직장, 연인, 부부, 친구 사이에서는 언제나 갑과 을이 존재한다. 갑자기 왜 갑과 을이 서두에 나왔을까. 나는 늘 편집자와 저자를 두고 이들을 어떤 관계로 정의해야 할지 생각해왔다. 명칭 그대로 편집자는 저자의 원고를 세상에 내보내는 일을 하고, 저자는 자신의 글을 책으로 출간하기 위해 편집자의 도움을 받는다. 요즘은 직업에 한계가 없다 보니, 작가가 1인 출판시장에 뛰어들어 출판사의 도움 없이 책을 만들기도 한다. 나 또한 저자를 섭외할 때 받았던 거절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독립출판이었다. 반대로 출판업 종사자들도 ‘책 만드는 법’, ‘편집자의 일상’, ‘작가 되는 법’ 등의 주제로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이렇듯 저자가 편집자가 되고, 편집자가 저자가 되는 시대에 누가 갑이고 을인지를 꼭 구분해야만 할까?
나는 편집자가 ‘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출판 계약서만 봐도 저자가 갑이요,출판사는 을이니까. 언젠가 어느 한 저자분이 계약서를 보고선 “제가 갑이에요?”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난다. 여러 출판사의 러브콜을 받은 작가라면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지니, 오히려 출판사들이 작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다른 출판사를 제치고 계약을 따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와 출판사의 갑을관계가 선명해진다. 나도 꼭 같이 일해보고 싶고, 붙잡고 싶은 작가님께는 내 열정을 보여드리기 위해 기획안을 드려 설명하고, 회사 소개, 출간 콘셉트 등 진정성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인연이 아니겠거니, 하고 또 다른 작가님을 섭외하기 위해 열심히 서칭을 한다. 어떻게는 내 기획안이 취소 폴더로 이동되는 걸 막기 위한 내 처절한 몸부림이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저자분들과 작업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운 좋게도 배울 점이 많은 저자님을 만나 함께 좋은 책을 만들겠다며 고군분투했던 적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내세워 상황을 곤란하게 만드는 저자님과는 소통하느라 애먹은 경우도 많았다. (편집자는 작가와 계약하기 전에는 그 사람이 계약한 이후에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미팅할 땐 화기애애했다가도, 계약서에 도장을 쾅 찍고 나서는 편집자를 을의 대상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편집자를 을이 아니라 평등 선상에 두고 소통하시는 저자님과 일할 때는 언제나 즐겁다.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한 아드레날린이 마구 샘솟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을의 느낌을 받으며 일할 때는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지?’, ‘에라 모르겠다. 이 업계를 어서 떠나든가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할 의욕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새내기 편집자 시절에는 독자 문의를 응대하다가, 내 잘못도 아닌데 이유 없는 욕설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었다. 수험서를 만들 때는 정답과 해설이 워낙 중요하다 보니 책을 읽는 수험생들이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려 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일은 책의 분야를 그리고 직업을 따지지 않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또 전화 목소리가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하대하는 독자 혹은 저자 분도 계셨다. 그래서 유리멘탈인 내 성격이 예전에 비해 모나게 변한 걸까? 이 업계에 발을 들었으면 저자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고, 저자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는 예전 상사의 말이 떠오른다. 또 면접을 봤을 때, “저자와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들고 사회 경험이 점점 쌓일수록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만큼, 나도 상대방에게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직 어린 편이니, 경험을 더 쌓아야 하는 게 맞다.
편집자와 작가는 공생 관계다. 함께 열심히 협업해야 서로가 만족하는 책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좋은 관계가 형성되면 보도자료도 잘 써지고(쓰는 건 늘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 임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내 손을 탄 작품이 잘 팔릴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갑과 을을 정의하는 건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나 역시도 여러 사람들과 부닥치며 알게 모르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론 오해와 편견에 휩싸여 상대방을 당연하게 을이라고 생각하여 홀대하진 않았을까? 모든 관계는 언제든지 쉽게 변하기 마련이다.
아직도 책 한 권에 출판계에선 갑을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상문학상 거부 사태도 있었고, 인세 정산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작가와 출판사도 버젓이 존재한다. 업종을 떠나 대기업 횡포, 갑질 사태, 직장 내 괴롭힘이 사그라들지 않는 걸 보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갑을관계를 떠나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고, 권리를 인정해주는 곳이 많아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