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남편)과 맥시멈(아내) 그 사이
일본 작가 시부의 <나는 미니멀리스트, 이기주의자입니다>(2019)를 읽은 적이 있다. 누가 봐도 나는 맥시멈리스트에 가까웠기에 이 책이 썩 달갑진 않았다. 하지만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건 꽤나 흥미롭다. 냉장고와 침대 없이 사는 프로 미니멀리스트의 라이프는 한마디로 ‘쇼킹’했다. 조금이나마 미니멀한 삶에 도전하고자 불필요한 물건들을 내다 버렸으나, 다시 채워지는 걸 보곤 생각했다. ‘역시 이번 생은 글렀구나.’
우리 부부는 성격과 가치관의 합은 좋지만, 정리정돈과 청소 문제에선 삐걱거렸다. 남편은 타고난 미니멀리스트다. 청결한 집안에서 나고자란 영향이 지속된 것 같다. 청결도의 최고 단계가 100이라면 남편은 100, 나는 70 정도로 기준이 달랐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어머님의 청결도는 120이라고. 그래서 내 기준에선 남편 집이 깔끔해 보여도 어머님의 기준에선 청소가 덜 된 집이었다. 깔끔한 남편은 늘 어머님께 “아내 보기 부끄럽지 않게 청소에 신경 좀 써라”는 핀잔을 듣고 살았던 것이다.
가끔 시댁에 놀러 갈 때 어머님이 남편 집이 더러워서 어쩌냐고 내게 말씀하실 때도 애써 웃으며 표정관리를 했지만, 차마 ‘어머님, 실은 제가 더 더러워요’라는 속마음을 입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의 맥시멈 라이프를 다른 식구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는 남편이 감사할 따름.
내가 서울에서 파주로 이사했을 때의 일이다. 이사를 몇 번 다니면서 노하우가 제법 쌓여갔다. 이번엔 좀 더 편하게 짐 정리를 하기 위해 김장비닐봉지를 주문했다. 한때 <나 혼자 산다>의 모 배우가 아파트로 이사할 때 사용한 투명 김장비닐이 유용해 보여 다음에 이사 가게 되면 꼭 써먹어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구매한 가치가 있었다. 비닐이지만 많은 물건을 넣어도 구멍이 나거나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제법 튼튼했다. 어떤 물건이 들었는지 투명하게 보여 주방용품, 책상, 화장품, 옷 등 구분하여 정리하기가 수월했다.
사 두고서 쓰지 않은 물건들을 김장비닐에 가득 담았더니 현관문 사이가 가로막혔다. 싱크대와 화장실 사이에 떡 하니 자리 잡은 짐덩이를 찍어 남편에게 전송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쓰레기 무거우면 따로 둬, 내가 가서 버릴게.”
“응? 이거 쓰레기 아니고 내 짐인데?”
그렇다. 남편은 내 짐을 쓰레기로 착각한 것이다. 얼마나 난잡했으면 쓰레기로 보였을까. 그때 충격을 받고 불필요한 물건들, 특히 2년 동안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은 옷들을 버렸다.
왜 이사를 하면 할수록 짐이 늘어나는지. 버리는 물건보다 들이는 물건이 더 많다 보니 이제는 내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뿐더러, 찾으려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녀야 했다. (그렇다고 아예 난장판으로 살진 않아요) 서울 집보다는 좀 더 넓은 파주 집에 이사를 오고 나서 더 확장된 나만의 공간에 짐은 더 늘어만 갔다. 겉보기엔 짐이 별로 없어 보여도, 비밀은 ‘빌트인’에 있었다. 붙박이 형태로 곳곳에 설치된 수납장에 나의 잡다구리들을 숨긴 덕분에 나는 표면적으로 미니멀리스트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말부부 3년 차, 드디어 우리 부부는 합치게 됐다. 세종에 둥지를 틀게 돼 남편과 나는 한 달 간격으로 두 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정들었던 파주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좁은 집을 떠나 아파트로 간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수도권에 사는 친구들과 멀어져야 한다니 울적하기도 했다.
3년간 옷장 속에 고이 보관해둔 김장비닐을 다시 꺼냈다. 살림살이가 두 배가 될 테니, 최대한 짐을 줄여야 했다. 겨우내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옷가지와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렸다. 과거에는 애착 인형처럼 고이 모셔둔(손타지 않은) 물건을 버리면 마음이 쓰였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맥시멈의 삶을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닌 둘이니까, 나부터 달라져야지.
수년간 함께한 침대와 매트리스, 좌식 테이블, 의자, 이불 등은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내보냈고 전자레인지와 방치된 옛날 노트북은 폐가전 무상수거 서비스를 이용했다. 버릴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버렸는데도 남편 짐보다 훨씬 많았다.
대망의 이삿날. 먼저 떠난 용달차량에 실린 내 짐들이 새집으로 옮겨졌다. 남편에게 전해 듣기론, 당시 집을 지키셨던 어머님이 계속 들어오는 내 짐을 보고 크게 놀라셨다고 한다. (그것도 많이 줄이고 줄인 거예요. 하하) 둘이서 사는 새 공간에는 새로운 물건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물건에도 사람에도 조종당하지 말 것. 미니멀(남편)과 맥시멈(아내) 그 사이,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