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은 것
몇 해 전부터, 게임을 다시 좀 즐겨보자 해서 조금씩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오락실, pc게임, 콘솔, PC방 가릴 것 없이 게임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즐기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모른다.
친구는 본인이 게임 중독이라고 말하며 게임을 끊을 수 없다고 했다. 난 중독이라 생각하진 않았어도, 친구 못지않게 숨 쉬듯 게임을 했는데 어느 기점으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결별했던 게임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냥 ‘일을 끝내고 잠깐 게임을 하는’ 그런 모습 혹은 행동을 하고 싶어서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뭔가 구미가 당겼던 것들의 대부분은 ‘그것’ 자체보다, 그것을 하는 나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사진을 ‘찍는’ 행위보단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나의 모습 같은 그런 것들.
아무튼, 오래간만에 좀 해보려 하니 장르나 종류나 뭘 해야 할지는 잘 몰라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중 게임 선택에 적잖이 선택을 주는 것이 가끔씩 보던 유튜브 게임 방송이었다. 틀어놓고 있다가 재밌어 보이면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것이다. ‘마인크래프트’가 그 시작이었고 최근엔 ‘사과게임’ 이 있다.
‘사과게임’은 따로 구매가 필요하지 않은,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냥 하면 되는 게임이다. 1부터 9까지 무작위로 배열된 숫자판에서 합이 10이 되도록 드래그 해서 점수를 쌓는 단순한 게임이다. 보통 100점을 목표를 플레이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예전부터 사칙연산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해봐야 6~70점이 고작이었다. 게임 자체가 단순한 편이고, 작업 중에 가끔씩 분위기 전환으로 했는데. 몇 번씩 하면서 요령이 생겼는지 100점도 꽤 나오는 편이고 적당히 7~80점 정도 나오는 것 같다.
이 게임을 하다 보면 눈에 좀 익은 조합을 바로 캐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빠른 계산력이 필요했다. 서너 개가 넘어가는 낮은 수의 사과들을 보며 재빠르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겨 이게 10인지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1이나 2 같은 낮은 숫자의 배열을 보며 문득 아주 어릴 적 일화가 떠올랐다. 나는 형제는 없었지만 외가 식구들이 다들 가까이 살아 왕래가 잦았다.
그중에도 첫째 이모네가 운영하던 시장에 있는 치킨집이, 나를 비롯해 친척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였다. 가게는 홀과 붙어있는 방이 두 개인 상가 건물로 한 살 터울의 사촌동생과 네 살 위의 사촌형이 있어 자주 놀러 갔고 자고 온 적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치킨집은 장사가 아주 잘 되었기 때문에 큰 이모는 닭을 튀기고 이모부는 항상 배달을 나가셨다. 그래도 오후 시간엔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이었다.
근처에는 오락실이 있었는데, 사촌동생과 나는 집에 있는 콘솔게임이 질리면 오락실로 직행하곤 했다. 당연히 게임비가 필요한데, 큰 이모는 언제나 그냥 주진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와 동생에게 10 이하 무작위 숫자를 몇 개씩 불러 주고는 각 숫자를 합한 정답을 맞히면 얼마씩 주는 것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방에서 이모가 앉아있으면, 나와 동생은 이 경기의 공식 자세라도 된 듯 웅크리고 엎드려 바닥을 바라보고 경기를 준비했다.
이윽고, 큰 이모 입에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1 더하기 3 더하기 2 더하기…” 이런 식으로 무작위 숫자가 흘러나온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또 누군가는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에 숫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게임의 진행은 몇 판 정도 이뤄졌고, 사촌동생과 둘이서 혹은 다른 친척들과 여러 명이서 하기도 했다. 먼저 정답을 맞힌 사람에게만 상금을 주었는지, 맞춘 사람 모두에게 주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나도 돈을 꽤 받았다.
문제는 내가 맞춘 게 아니라 뭔가 ‘개평’처럼 혹은 ‘참가상’처럼 받았다는 것이다. 이르면 초등학교 입학 조금 전에서 늦어도 중학교 전까지였던 그 경기 기간 동안 난 한 번도 문제를 맞혀 본 적이 없다.
큰 이모의 배려가 충분해서 한 번을 못 맞춰도 그 돈을 들고 등신 같이 오락실로 달려갔냐면 그건 아니다. 어린 시절 나는 자존심이 강한 편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연습이라도 해볼 만할 텐데 그렇기엔 보상이 너무 컸는지 암산의 벽이 너무 높았는지 몰라도, 한 번도 맞춰볼 궁리를 하진 않았다.
어쩌면 동생의 암산 실력이 내가 자존심을 부리기엔 너무나 뛰어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촌동생은 실제로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그렇게 기억한다.
이후, 학창 시절에는 알게 모르게 암산에 대해 의식을 했던 것 같다. ‘난 암산이 안되니까’라는 생각보다는, 노트에 재빠르게 숫자를 써 계산하면 된다는 느낌이었다. 손을 못쓰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놀랍게도 그런 일이 있긴 했다.
중간고사를 앞둔 때에 본의 아니게 양손을 다치는 바람에 곤란한 상황이 생겼다. 하필 공부도 써 가면서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문제는 수학이었다. 붕대를 감은 양손으로는 이름 석자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어찌어찌 책을 펴고 쳐다보고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머릿속에서 수열과 확률에 대한 계산을 그려본다. 양손을 책상에 올리고 자는 것도 아닌 자세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면 꽤나 가관이었다. 어찌어찌 시험을 마쳤고, 평소보다 조금 낮은 수학 점수는 양손을 봉인당했다는 핑계로 합리화되었다.
물론 암산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큰 이모가 열었던 경기는 내 기준에는 초를 다투는 긴박한 느낌이었고, 시험은 상대적으로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군 복무 시절 내 머릿속 계산기는 그 성능이 대폭 향상된다.
맡은 일의 특성상 계산기를 들고 다녔는데 일 꽤나 한다는 계급이 될 때쯤, 자연스레 손이 아닌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게 되었다.
아마 그때 느꼈던 것 같다. 평생 암산은 젬병인 줄 알았는데, 그냥 안 해서 그런 것이라는 걸.
보통 이런 식의 전개라면 ‘뭐든 하면 되는구나’라는 교훈 같은 어떤 것이 따라와야 할 것 같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지혜롭지 못하다.
그러면, 나라에서 제공한 암산 훈련으로 이제 계산 좀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복학 후에는 공학용 계산기를 사용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계산기 앱을 켰다. 잘하면 좋지만 대안이 있는데 굳이라는 생각이었다.
가끔은 궁금하다. 동생은 아직도 암산을 잘할까? 그리고 경기의 주최자였던 큰 이모는 그 숫자들을 우리에게 몇 번씩이나 불러주며 항상 정답을 알고 있구나.
그리고 당시에 문제를 내던 이모보다 더 나이가 든 지금 다시 경기를 열면 난 맞출 수 있을까 하는 뭐 그런 것들.
물론, 물가를 반영해서 상금은 만원은 해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