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를 선택했다면 자신을 숨겨라
조직에 남아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떠나지 못해서인지, 남기로 선택해서인지 그 경계가 흐릿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이곳이 더 이상 나를 성장시키는 공간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했고, 같은 회의실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조직은 늘 힘 있는 사람의 언어로 움직였다. 능력은 직급 앞에서 정중히 접혔고, 질문은 불편함이 되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나는 배워야 했다. 말하지 않는 법을. 옳음을 설명하는 대신, 안전한 침묵을 선택하는 법을. 그건 비겁함이 아니라 생존술이었다.
한때 나는 잘하려 애썼다. 성과로 증명하면 달라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조직에서 유능함은 늘 양날이었다. 필요할 때는 앞에 세워지고, 불편해지는 순간 조용히 뒤로 밀렸다. 그때 깨달았다. 이곳에서 능력은 자랑이 아니라 보험처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당장 써버리면 소모품이 되지만, 남겨두면 언젠가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조직을 인생에서 떼어냈다. 여기를 삶의 전부로 보지 않기로 했다. 월급을 받는 현장, 시간을 교환하는 장소, 내 인생의 일부일 뿐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대를 줄이자 분노도 함께 줄었다. 이해하려 하지 않으니 상처도 덜했다. 설득하지 않기로 마음먹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대신 나 자신에게만은 정직해지기로 했다. 이 선택이 옳다고 합리화하지 않기로, 다만 지금은 버티는 중이라고 정확히 말하기로 했다. 조직에는 순응하되, 내 안에서는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기로 했다. 조용히 일하고,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조직 밖에서는 나만의 길을 준비했다.
아직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패배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체가 아니라 유예다. 언젠가 이동하기 위한 시간이다. 오늘도 나는 조직 안에서 말을 아끼며 살아간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잘 살 필요는 없다.
망가지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 정도의 존엄만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