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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Jun 03. 2019

어차피 일어났을 일

노동자의 날에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답하다

5월 1일 노동자의 날. 이제는 어디 소속된 곳이 없어서 빨간 날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여느 때처럼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갑자기 휴대폰 진동 소리에 놀라 액정을 쳐다보았다. 구글 캘린더 일정. 텍스트는 단 한 줄, ‘Are You Happy Now?’ 그게 다였다. 어떤 설명도 없이 노래 제목이기도 한 영어로 된 한 문장만 있었다. 대체 이게 뭐지? 계정 해킹이라도 당한 건가. 의미도 알 수 없고 기억에도 없는 ‘일정’이 gmail로 오자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드디어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때는 2017년 5월. 딱 2년만 회사에 더 다니다가 그때도 내가 이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러니까 2019년 5월 1일에 ‘행복하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Yes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그때는 가차 없이 조직을 박차고 나가자는 결심을 했었더랬다. (그걸 아주 새까맣게 잊고 있었고.) 얼마나 굳은 결심을 했으면 2년 뒤의 날짜로 구글 캘린더 일정까지 추가해서 알람이 가도록 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책장 뒤에서 책장 너머로 보이는 과거의 자신에게 어떻게든 미래를 경고하기 위해 애썼던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2019년 5월이라는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그보다 약 8개월 앞선 2018년 여름에 퇴사를 해버렸다. 조직을 떠나서 혼자 일해보겠다고 선택한 것을 후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은 종종 했다. 준비 없이 너무 빠르게 결정을 내린 거 아닐까. 조금만 더 ‘존버’하면서 조직에서 단 물을 더 뽑아먹고 나올 걸 그랬나. 대체 왜 이 나이까지도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어떤 결정이든 이렇게 대책 없이 감에 따라 저지르는가. 조금 불안해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캘린더는 내가 이미 2017년부터 준비를 해왔고, 단지 그걸 조금 더 빠르게 결단 내리고 실행했을 뿐이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정말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미래의 나는 이미 조직을 떠나 다른 일을 업으로 삼아 혼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2017년의 나한테 그런 엉뚱한 알람을 설정하도록 만든 것 같달까. 어차피 19년 5월 1일에는 벌어질 일이 단지 18년 7월에 벌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책장 너머로 미래의 내가 진짜 과거의 나한테 책을 떨어뜨리는 아주 미세한 신호 하나라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한테 일정 알람과 같이 아주 작은 장치 하나로 현재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가치를 계속 지키면서 살고 있는지 신호를 보낼 수 있다. 17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래서 너 지금 행복하니?” 하나였고, 아마도 그건 그때 내가 행복감을 많이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가장 부족하다 생각하는 걸 계속 갈망하니까.) 

그리고 알람이 울린 그때, 나는 마침 카페에서 글을 쓴 뒤 집으로 돌아가려 짐을 챙기던 중이었고, 다행히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매일 “너무 행복해서 감사합니다.”의 뭐 그런 격정적인 상태는 아니다. 글은 쓸수록 어렵고, 더 잘 쓰고 싶고, 그런데 한계가 명확한 것 같아서 불안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또 그런데도 어떻게든 써서 해내고 싶다는 끊임없는 고뇌의 연속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한 늘 일정 수준의 불안과 고통이 있다는 게 맞겠지. 그런데도 나는 그날 바로 별 망설임 없이 “Yes.”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건 아무리 힘든 점이 있어도 결국 이 일을 할 때 가장 만족스럽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2020년에도 질문을 하나 보내 두고 싶다. 그때도 또 행복하냐고 물어봐야 할까. 똑같은 건 참지 못하는 편이라 다른 질문을 한번 준비해보고 싶은데. 내년에는 아마도 “너 요즘에도 쓰고 싶은 글을 쓰니?” 이런 질문이 적당할 것 같다. 쓰는 건 물론이고 쓰고 싶은 글을 꾸준히 쓰는 삶. 그런 일상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는 것 같아서. 2020년의 나한테 질문을 보냈다. 답은 기다려봐야지 뭐. (아마 또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알람에 놀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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