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맛이 나는 영어
미나리라는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카데미상 후보작에 이름을 올리면서 작년 기생충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 많은 분들이 기대를 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듯합니다. 4월 25일이 시상식이니 앞으로 한 달 정도 후에는 결과를 알게 되겠지요. 영화도 영화지만, 이 영화의 무대인사에서 유창한 영어실력을 선보인 윤여정 배우가 큰 화제라고 해서 저도 궁금해서 동영상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윤여정 영어로 유튜브에서 검색하니 수많은 결과가 나오는데, 가장 위에 나오는 5분 정도 되는 동영상을 찾아서 봤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XEv0H7vbNQ)
제가 누구 영어를 평가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만, 미국에 이민 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영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분들의 영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이미 지난 글들(https://brunch.co.kr/@tystory/60) (https://brunch.co.kr/@tystory/55) (https://brunch.co.kr/@tystory/31)에서 여러 번 설명을 드린 바가 있지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고, 벤치마킹이 되기도 하고, 제게는 이런저런 의미가 있습니다.
인터뷰나 시상식 말고 윤식당이라는 예능 프로에서도 생활 영어를 편안하게 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방송에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아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 짧은 5분짜리 유튜브 동영상을 본 것만으로 어떤 식의 영어였을지가 짐작이 됩니다. 일단 영어를 하는 데 있어서 부담이 느껴지지 않네요. 그렇게 뭔가 잘하려고 의식을 한다는 느낌이 없고 매우 편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입니다. 나무위키의 윤여정 편에 보면, 본인이 출연한 윤스테이를 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https://namu.wiki/w/%EC%9C%A4%EC%97%AC%EC%A0%95 에서 발췌)
"능숙한 영어 회화는 윤여정을 지적인 배우로 보이게 하는데 한 몫한다. 해외에서 촬영한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을 통해 수준급 영어 실력을 많이 보였다. 꽃보다 누나 촬영 당시 외국인과 자유자재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며 후배 여배우들로부터 리스펙을 받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영화 미나리 무대인사 때도 통역이 있었지만 본인 의사는 본인이 직접 영어로 진행했다. 한편 또 한 번 영어 실력이 화제가 된 윤스테이를 두고서는 캐나다 사람인 최우식과 NYU 출신인 이서진은 냅두고 50년 전에 먹고 살기 위한 생활 영어만 배운 자기한테 계속 영어를 시키는 바람에 스스로가 영어를 쓰는 게 보기 싫어서 윤스테이를 안 본다고(...) 밝히기도."
여기서 "스스로가 영어를 쓰는 게 보기 싫어서"라는 이야기에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도 한동안 제가 회의를 할 때 하는 영어를 녹음해놓고, 나중에 반복해서 들으면서 발음이나 단어, 문법 등을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있는데요, 이게 오래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시간도 많이 걸릴뿐더러, 틀리는 부분을 계속 틀리고 있는 스스로의 영어를 듣고 있으면 동기 부여보다는 좌절감이 들 때가 더 많습니다. 영어가 하루아침에 늘지 않잖아요? 그런데 본인의 영어를 녹음해서 몇 주, 몇 달 들으면서 스스로 교정을 한다고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점점 듣기 싫어지는 거죠.
제가 그 부분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이분이 매우 편하게 거리낌 없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영어를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분일 거라는 짐작이었습니다. 또한 그에 맞게 아마도 영어 공부를 꽤 열심히 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짐작도 해 봅니다. 제가 지난 글(https://brunch.co.kr/@tystory/47)에서도 밝혔지만 미국에 산다고 저절로 영어가 늘 거라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잔기술은 분명 늘긴 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힘들던 식당에서의 음식 주문도, 여기서 살다 보면 대략 어떤 식으로 주문 과정이 이루어지고 대충 뭘 물어보고, 대충 어떻게 대답하면 되는지가 익숙해집니다. 뭐 어찌 보면 그것도 영어가 늘었다고 볼 수도 있긴 합니다만...
윤여정 배우는 47년 생으로 파평 윤 씨라고 합니다. 저희 어머님께서 44년생 파평 윤 씨이시니 집안 동생 되시네요. ^^ 젊은 배우 시절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저는 그 당시 이 분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만한 나이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잘 나가던 28세 때인 1975년에 가수 조영남과 결혼하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그때 그렇게 잘 나가던 가수와 배우가 결혼을 해서 미국에 갔으면 떵떵거리고 잘 살았을 거라고 짐작을 했는데, 그 당시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시카고에서 자영업을 했었을 거라는 댓글도 있고, 본인 스스로도 아이들 키울 때 학비를 벌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미국에서 일을 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13년 동안 미국에 살았었다고 하는데,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자영업을 하던 직장을 다니던 미국 사람들과 상대를 했다면 영어가 꽤 늘었을 거라고 짐작도 합니다. 돈을 쓰는 영어는 쉽지만 돈을 버는 영어는 어렵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것도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입니다. 같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더라도 어떻게 생활했느냐에 따라서 귀국 후 영어 실력이 많이 다르다고 하죠. 윤여정 배우는, 뭐 이것도 순전히 제 짐작입니다만, 꽤 악착같이 영어 공부를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다닐 때도 워낙 수재였다고 할 만큼 머리도 똑똑했다고 하고, 동료 배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본을 암기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하네요. 저희가 셱스피어도 아니고 얼마나 대단한 문장을 만들겠습니까? 기억하고 있는 표현들을 조합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암기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영어를 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성격입니다. 영화에서의 역할을 보면 굉장히 개성 있는 역할을 많이 하는데, 그렇게 다양한 캐릭터를 연구하고 소화하려면 꽤 근성이 있어야 할 거라고 짐작합니다. 조영남과의 이혼이라는 스캔들을 대하는 방식도, 조영남 가수는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관련 이야기를 많이 했던 반면에 윤여정 배우는 가타부타 이야기 없이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고, 묵묵히 배우 생활에 전념했다고 하죠. 그런 성격이, 낯선 미국 생활을 극복하는 데에도 드러났을 겁니다. 한국에서 잘 나가던 배우가, 머나먼 미국 시카고에 와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비현실적인 사람이고, 말도 잘 안 통하는 곳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먹고 벌려면 이런저런 서러운 일도 많이 겪었겠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근성이 발휘되고, 생존형 영어를 터득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 영어는, 스스로 녹음해서 들어보면 매우 빠른 편입니다. 한국어는 그렇게 빨리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발표나 강연 같은 것을 할 때 꽤 반응들이 좋았었죠. 영어를 할 때도 그런 성격이 나오는지, 성량도 풍부하고 밖으로 내지르는 스타일이라서 목소리의 볼륨 문제는 전혀 없으므로 내용만 잘 채우면 되겠습니다. ^^ 윤여정 배우의 영어를 하는 스타일은 쉽고 담백하더군요. 단수, 복수의 사용이나 Be 동사의 사용과 같이 한국 사람들이 자주 틀리는 문법이 아주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전혀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사실 대부분의 표현이 시제라던가 단어의 사용이 매우 적절합니다. 문장이 길지 않고 발음과 인토네이션, 즉 강세를 주고 단어 사이의 간격을 붙이거나 띄우는 것이 매우 편안하게 들리더군요.
저 위의 동영상 50초쯤에 보면, 무슨 시상식인지 모르겠지만, put myself together 같은 표현은 저도 그렇게 쉽게 쓸 수 있을 자신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사용을 하고 있네요. 그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My English is not perfect."에서도 펄~펙트라고 들리는 부분의 영어 r 발음도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인데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thoughts라는 단어의 그 "번데기" 발음도 훌륭하고요, 1분 44초쯤에 보면 "And I greatly appreciate it"이라는 말을 하는데, appreciate이라는 단어는 저도 즐겨 사용하는 아주 고급진 표현이라서 그 부분도 좋지만, 특히 제가 감탄한 것은, greatly의 그레이틀~리라는 마지막에 ~ly로 끝나는 발음을 그렇게 정확하게 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그 "~을리" 발음 때문에, 특히나 긴장된 상황에서는 그다음 단어의 발음이 뭉개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부분도 잠깐 머뭇거린 후에 정확히 appreciate 발음이 이어지더군요. 이건 제가 스스로 회의 때의 제 발음을 녹음하고 몇 번을 문제로 인지했음에도 고치기 힘들어하는 단어와 발음의 연결인데 참 쉽게 하시네요.
사람이 하는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화제가 된 윤여정 배우의 영어 실력을 보면서, 역시 그 사람이 바탕에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꾸미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없는 사람은 정신없는 영어를 하게 될 거고, 담백한 사람은 담백한 영어를 하게 되겠지요. 제 영어는 어떤 영어 일지 새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