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사랑꾼의 사랑의 역사
또 살 거야?
나이키 매장에서 크로스핏화를 향해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를 보며 지니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크로스핏화는 처음인데! 나는 '산다'는 건 긍정하되, '또'는 부정하며 반박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왼손가락을 한 개씩 접으며 답했다. 올해 초에 수영하겠다고 산 수영복 세 벌. (아 그건 수술해서 재등록 못 한 거잖아!) 홈트 하겠다고 샀으면서 결국 나한테 준 아령 세트. (너 잘 쓰면 됐지) 집에서 필라테스 하겠다고 산 요가 매트랑 짐볼. (그거 중고로 팔 거야!) 이거 다 1년도 안 썼잖아. 이번에는 1년 정도 하고 사. 제발. 지니는 크로스핏을 등록하기 전에 일단 신발부터 사겠다는 나를 기어이 뜯어말렸다. 그렇게 매트콘 블랙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실로 반박할 여지없는 합당한 조언에 나는 입이 잔뜩 튀어나와서 툴툴대며 말했다.
나한테는 장비가 동기부여야!
장비발은 운동하는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을 준다. [Web 발신] 유*리 10/19 13:16으로 시작하는 결제 문자를 달마다 확인할 때, 그래도 돈을 쏟아부은 만큼 운동을 빠지지 말고 가야겠다고 다짐하곤 하니까. 돈이 아까우면 몸을 움직이게 된다. 또박또박 들어오는 월급이 직장을 나가는 힘이라면, 꼬박꼬박 할부로 나가는 운동 비용은 체육관에 나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 같은 운동 초보자는 캐시 템의 버프라도 받아야 한다. 전쟁을 나갈 때 장수에게 갑주가 필수이다. 이처럼 적절한 장비는 작고 큰 부상으로부터 미숙한 나를 지켜주며, 동시에 운동 능률을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큰 무게를 들어 올릴 때 척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배 안에 압을 가득 채워 넣어야 한다. 하지만 초보인 나는 계속 복압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럴 때 복압 벨트를 사용하면 한결 편하게 강한 복압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초보자의 좋은 장비 구매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나는 초보일수록 장비를 적절히 이용하는 게 현명하다고 본다. 원체 싸움을 잘하는 놈이야 맨주먹으로도 14대 1을 다 쓰러트리겠지만, 나는 부족하니까 좋은 무기에 튼튼한 갑옷을 입겠다는데 뭐 그리 큰 죄겠는가. 운동 수행 능력이 열등하면 합리적인 가격의 좋은 장비를 동력 삼아 성장할 수도 있다. 그건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질타받을 일이 아니다. 그래도 지니의 당부에 따라 일단 상담부터 받고 등록하고 나서, 장비를 사기로 했다. 혹시 체험하러 갔는데 ‘스피닝’ 당할 수 있으니까.
예전에 헬스를 등록하러 갔다가 헬스장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스피닝 수업을 보게 됐다. 스핀 바이크를 타는 모두가 최신곡에 맞춰 신나게 온몸을 흔들어 재끼는데, 그 모습이 세상 그렇게 신나 보이는 거다. 결국 그날 상담도 하지 않고 홀린 듯이 스피닝을 등록했고, 최저가 실내 스핀 바이크까지 찾아서 장바구니에 넣을 정도로 운동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내가 굉장히 나약하고 내향적이라는 걸. 스피닝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상하체를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페달을 밟느라 바빠서 상체 동작은 막춤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나는 첫날부터 신체의 한계를 무시한 채, 내 발이 내 발이 아닌 듯 느껴지는데도 강사를 열심히 따라 하며 무리해서 페달을 밟았다. 중간에 내려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얼렁뚱땅 첫 수업이 끝났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얼른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스핀 바이크의 페달에서 확 두 발을 뺐다. 그리고 두발로 천천히 땅을 딛으려다가, 쾅. 그만 두 무릎으로 착지해버렸다. 나의 통뼈와 바닥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스피닝 실 안에 크게 울렸다. 그와 함께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됐다. 그때는 암실에서 번쩍이는 형광 레이저와 쪽팔림 때문에 고통을 몰랐지만, 집에 와 보니 양 무릎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운동을 막 다녀와서 힘들기도 하고 또 ‘에이 걸을 수 있으니까 괜찮겠지’ 싶어서 연고도 바르지 않고 잠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양 무릎의 멍이 더 크게 부어오른 게 아닌가. 아파서 걸어 다니기가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쪽팔려서 어디 말도 못 했으니, 누가 ‘요즘 운동 잘하고 있냐’고 물으면 ‘어, 으으응’이라고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왜 무리했어! 무릎의 시퍼런 아우성이 한 달 내내 아프게 들렸다. 그 후로 무릎이 다 낫고 나서 다시 수업에 가봤다. 그런데 노래에 맞춰 춤추듯 운동한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또 예전 같은 대참사가 있을까 봐 걱정이 돼서, 결국 스피닝은 딱 첫날만 가고 그 뒤로 아예 안 가게 됐다. 그나마 조급하게 스핀 바이크부터 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때의 교훈을 되새겼다. 일단 상담해보고 나랑 맞을지, 내가 할 수 있을지 알아보고 결정하자! 그렇게 상담하러 간 날, 크로스핏장에서 설명을 들으면서도 사실은 조금 망설였다. 재밌어 보이는데 잘할 수 있을까? 웃긴 건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다른 회원들이 신은 크로스핏 화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 저거 내가 얼마 전에 지니랑 나이키에서 봤던 매트콘이잖아. 아니, 리복도 있네? 리복 크로스핏 나노도 예쁘다. 저 화려한 때깔 봐라. 딱 내 거네. 그렇게 신발에 눈독 들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관장님께 가볍게 물었다.
혹시 시작하면 (장비) 살 게 많나요?
네! 크로스핏화는 꼭 사시는 게 좋아요!
장비 사랑꾼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대답이었다. 크로스핏이 워낙 고강도 운동이기도 하고, 나는 운동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초보자이기 때문에 살 장비가 참 많았다. (오예) 크로스핏화와 무릎 보호대, 복압 벨트, 손 보호대까지. 그럼 빠짐없이 다 필요하지. 안전이 제일이니까! 나는 지니와 같이 봤던 까만 예쁜이를 지를 좋은 핑계라는 생각에 흔쾌히 크로스핏을 등록했다. 그렇게 크로스핏을 다닌 지 몇 달째, 요 근래 장비 사랑꾼을 가장 설레게 한 대사는 바로 이것이다.
매트콘 신다가 5년 뒤에 역도화로 바꾸시면 되겠네요.
이 얼마나 장비 사랑꾼에게 딱 맞는 운동인가. 5년 동안 닳고 닳을 대로 신다가 뒷굽이 매력적인 역도화로 갈아타야지! 그렇게 나는 하루라도 역도화를 빨리 사기 위해 오늘도 운동하러 간다. 이것 참, 장비가 이렇게나 운동에 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