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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Dec 01. 2020

"호스피스, 죽음을 안다는 것과 죽음"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 영화 "크로닉"

- "호스피스, 죽음을 안다는 것과 죽음"

- 영화 <크로닉, Chronic>, 감독-미셸 프랑코, 2015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우아한 통찰”, 영화 포스터의 소개글이 조금 과장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영화 크로닉. ‘우아한 통찰’이라고 표현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다소 ‘섬뜩’한 통찰마저 느껴졌다. 말기 환자를 환자의 가정에서 돌보는 중년 남자 간호사의 이야기이다.      


호스피스는 임종을 앞둔 말기 환자를 돌보는 일이다. 죽음학에서는 인간답고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말기 환자의 삶이 인간답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자. 죽음은 눈 앞에 다가와 있다. 나의 삶이 이제 끝인 것이다. 어떤 생각과 마음이 들겠는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당하기 힘든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내 손으로 음식을 먹을 정도의 기력도 없어 누군가 나의 입에 넣어줘야 한다. 목욕도 혼자서 할 수 없다. 극히 사적인 영역인 용변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말할 기운도 없어 의사표현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인간다움과 품위를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이런 상황에서 인간다움과 품위를 갖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환자를 인간적으로 품위 있게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과연 그것이 가능은 한 걸까?     

영화 속 몇 가지 장면을 통해서 생각해 보자. 우선, 영화 속 주인공인 데이비드가 돌보는 환자들은 그나마 가정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다. 호스피스 형태가 입원형이든 가정형이든 아직도 많은 환자들은 호스피스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한다. 즉 삶을 마무리할 기회도 없이 중환자실에서 힘겨운 치료를 받다가 가족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삶을 끝내거나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판정 하에 가족과 사회의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로 요양시설이나 집에서 삶을 끝마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속 주인공 데이비드는 자신의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고 세심하게 배려한다. 환자의 몸상태, 기분, 주변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며, 환자를 최대한 편안게 해주기 위해 물어보고 제안하고 보살핀다. 그가 돌보던 에이즈 환자가 삶을 마감했을 때,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혼자서 술집을 찾은 데이비드는 이제 막 약혼을 했다며 말을 걸어오는 옆자리의 젊은 커플에게 죽은 자신의 환자를 마치 자신의 아내였던 것처럼 말한다. 데이비드의 마음은 아마도 그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축가였던 두 번째 환자를 돌보면서는 환자가 설계했던 건물을 직접 찾아가서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 액자에 담아 선물한다. 손을 잡아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입혀주는 그의 손길과 모든 행동, 그리고 대화에서 환자에 대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들이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환자여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지친 환자여서가 아니라 그저 한 인간을 대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데이비드가 겪었던 어떤 과거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차분하고 편안하게 환자를 대하는 그의 모습은 ‘우아하게’까지 느껴진다.     

다음은 데이비드가 돌보는 환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앞서 설명한 대로 말기 환자의 상태는 품위를 찾기 쉽지 않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자신이 누구였든 어떤 위치에 있었든지 간에 환자는 자신의 모습을 볼품없고 초라하고 심지어 비참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 모습은 주변 사람들 그리고 가족에게조차 보이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삶의 의욕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남아 있는 삶, 아니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죽음이 빨리 찾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언제가(또는 곧, 당장이라도) 우리에게도 찾아올 그런 모습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가끔 환자를 찾아와 위로를 건네고 시간을 보내주는 가족과 친지들이 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호스피스 간호사인 데이비드만 남는다. 가족들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을 목욕시켜주고 옷을 입혀주는 것도 데이비드이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도 데이비드이고, 거의 모든 시중을 드는 것도 데이비드이다. 주인공이 돌보던 또 다른 중년 여성 마르타는 의사로부터 자신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자녀들과 전화 통화를 하던 그녀는, 자녀들이 걱정할까 봐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수화기 너머의 딸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럼 이달 말에 나 안 가도 되겠네?” 이 대사를 듣자마자 뭔가 필자의 마음에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은 왜일까? 현실은 그렇다. 옳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는 것이다. 이 환자는 주인공 데이비드에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다.  앞선 건축가 환자와 주인공의 대화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환자가 말한다. “내가 가족들에게 의지하게 될까 봐 두려워”, 그러자 데이비드가 말한다. “그들도 당신이 자신들에게 의지할까 봐 두려울 겁니다.” 주인공이 돌보는 환자들은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이 아닌 데이비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정리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우리 주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죽음과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죽음이 늘 그렇듯이, 영화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독자들에게도 그렇기를 바란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소 충격적이다. 죽음과 죽어감을 말하고 있는 필자를 한없이 초라하고 겸손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말이다. 감독인 미셀 프랑코는 “이 결말로 끝내기 위해 94분의 러닝 타임 중 90분을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2015년 칸영화제 각본상 수장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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