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현장에서 09화

만경봉 92호을 찾아라②

북한과 평창 동계올림픽

by 정준영
묵호항은 하나의 작은 분단국 같았다.
주인 없는 강아지만 자유롭게 인의 장벽을 넘나들 수 있었다.


#2018년 2월 6일


예측과 달리 만경봉 92호는 묵호항으로 들어오기로 했다. 강릉항은 북한 예술단이 공연할 강릉 아트센터와 가깝긴 했지만 만경봉 92호가 정박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만경봉 92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묵호항 곳곳을 훑고 다녔다. 그러던 중 적당한 창고를 발견했는데 마침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남의 건물 옥상에 제멋대로 올라가 촬영할 순 없었다. 어디엔가 연락 수단이 있겠지 돌아다니다 건물 외벽 한편에 붙어있는 관리인 연락처를 발견해 전화했다. 그는 흔쾌히 촬영을 허락했다.


만경봉 92호는 이날 오전 9시 50분쯤 동해 해상 경계선을 통과했다. 이후 우리 호송함의 인도를 받으며 오후 4시 30분쯤 묵호항 방파제 안으로 들어왔다. 영상취재기자 선배는 ENG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달아 배를 당겨 찍었다. 배 곳곳엔 북한 인공기가 달려 있었고, 몇몇이 선상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반면 객실 유리창엔 전부 커튼이 쳐져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보안상 가렸을 것이다.

만경봉 92호가 정박한 묵호항 / 직접 촬영


작은 분단국


만경봉 92호가 정박한 묵호항 주변은 경계가 매우 삼엄했다. 경찰은 항구 바깥에서부터 만경봉 92호 주변까지 사람으로 장벽을 둘러쳤다. 입구를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은 모두 검문을 받아야 했다. 강아지 한 마리만 자유롭게 인의 장벽을 넘나들 수 있었다.

만경봉 92호 주변을 경계하는 경찰들과 그 옆에서 뛰노는 강아지 / 직접 촬영

항구 한편에선 대한애국당이 북한 응원단의 방남을 반대하며 집회를 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무대로 전락했다는 것이 그들 주장이었다. 참가자들은 김정은 당시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인쇄된 사진과 인공기 그리고 한반도기를 난도질하거나 불태웠다.

경찰들은 소화기를 살포하며 집회 해산에 나섰다. 집회 참가자들은 저마다 기침을 해대며 손에 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둘러댔다. 수백 명이 뒤엉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각자의 정치적인 견해는 존중하지만 올림픽이라는 국제무대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워 국격을 떨어트릴 일인가 싶었다. 그게 보수단체든 진보단체든 뭐든지 간에.

대한애국당이 '화형식' 퍼포먼스를 진행하자 경찰이 소화기를 뿌리며 제지에 나섰다. / 직접 촬영

난리법석인 와중에 형광색 스키복 차림의 한 여성 외신 기자가 마이크를 잡고 리포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현장 상황을 전했다. 프롬프터(대본을 화면에 띄워주는 장비) 따위는 없었다. 마치 SBS 드라마 '피노키오' 속 박신혜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방송사라면 이렇게 불확실성이 큰 장소에선 현장 연결을 잘하지 않는다. 영상은 실시간으로 송출할 순 있겠지만. 기자가 중계를 하더라도 아마 시위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뉴스가 심심한 이유가 있다.


다른 남성 외신 기자는 머리에 털모자를 쓴 채 보도했다. 역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 기자들은 재난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거나 폭우나 폭설이 오는 현장에서 바람막이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긴 하지만, 저렇게 털모자를 쓰고 중계를 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동계올림픽 현장에선 털모자가 오히려 TPO(Time·Place·Occasion)에 맞는다고 느껴졌다. 스포츠 행사에서 깔끔한 드레스 셔츠를 입고 중계를 하는 것이 더 어색해 보인다.

스키복 차림의 외신기자가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 리포팅하고 있다. / 직접 촬영
한 외신기자가 털모자를 쓰고 리포팅하고 있다. / 직접 촬영

소란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부터는 항구 입구에 뻗치면서 만경봉 92호와 북한 응원단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경계는 삼엄했고, 북한 예술단은 식사 때만 관광버스를 타고 묵호항을 드나들 뿐이었다. 버스 창문도 여지없이 커튼으로 모두 가려져있었다.


묵호항은 하나의 작은 분단국 같았다. 버스가 지나가면 어떤 이는 한반도기를 흔들며 환호했고, 다른 이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야유를 보냈다. 세계 각국의 외신들은 이런 모습을 촬영해 보도했다. 북한 응원단은 이런 광경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그리고 세계 시민들은 이런 한국의 모습을 어떻게 느꼈을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