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

페미니즘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by 김선비

그 무렵 강남역 살인 사건이 터졌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조현병에 걸린 남자가 20대 여자를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페미니스트들 역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사건은 한 미치광이에 의해 우연히 발생한 사고에서 여성 혐오 살인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강남역에 모여 “여자라서 죽었다.”, “남자라서 살아남았다.”,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도 페미니즘이라는 이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전까지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은 ‘남자에게 사랑 못 받은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들이 자기들도 사랑해달라고 열등감 폭발시키는 사상’이었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는 족속들이다. 밥값도 내줄 수 있고, 명품 가방도 선물해줄 수 있고, (능력만 된다면) 집이나 차를 사줄 수도 있다. 예쁜 여자의 권익은 남자들이 알아서 지켜준다. 그런데 저들은 여성의 권익을 위해 싸우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들은 누구겠는가? 당연히 남자라는 그늘 아래에서 안락함을 누려보지 못한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들이겠지. 이게 그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이나 기사들을 찾아보면서 알게 된 페미니즘의 진짜 의미는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페미니즘은 남성의 몫을 일방적으로 떼어서 여성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사상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특성과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으로 주입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해체함으로써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가 아니라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가령 여성들은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고, 남성들은 여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남성과 여성의 고민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여성은 집안일을 하고, 남성은 바깥일을 하는 게 어울린다는 편견 때문에 남성은 돈을 많이 벌어서 가정을 부양해야 하고, 여성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내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편견이 사라지면 된다. 여성은 사회 생활을 하는 것보다 집안일이 어울린다는 편견이 사라지면 적극적으로 도전해서 남자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여성들이 많아질 것이고, 그러면 남자는 돈을 벌고 성공해야 한다는 편견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남녀는 둘 다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실은, 내가 이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진짜 이유는 내가 진짜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전통적 성역할 고정관념을 타파함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라는 게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통적 성역할 고정관념으로부터 고통받는, 즉 그 성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남성과 여성을 의미한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애교 많고 조신하고 순종적인 성향을 가진 여자라면, 돈 많고, 키 크고, 몸 좋고, 도전정신과 공격성을 갖춘 남자라면 오히려 전통적 성역할 고정관념이 있어서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분명 처음에는 너도 날 좋다고 했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금방 마음이 변해버렸다. 그건 아마 네가 내게 기대했던 남자다운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않고, 지나치게 복잡하고 생각이 많으며, 남자답게 여자를 리드하고 확신을 주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그런 남성성이 옳지 않다고 했다. 여성도 능동적으로 자기 미래를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여성도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는 먼저 다가가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여성을 휘어잡고 리드하는 게 남자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건 여성을 남성에게 지배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며, 나아가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행되는 성적 접근, 즉 성범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기보다 오히려 내가 먼저 기대려고 했던, 마음 다치는 게 싫어서 그 사람이 먼저 표현하기 전에는 무엇 하나 먼저 표현하지 않으려 했던 약해빠진 내 모습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는 말을, 내가 더 남자답게, 멋지게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네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여자라면 내 가치를 알아보고 돌아올 거라는 말을 나는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 사상에 빠져 있었다. 성역할 고정관념이 사라진 세상, 남자 혹은 여자답게가 아니라 자기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과 같은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나는 남자답지 못한 자신을 인정하기 싫은 거였다. 내가 만약 여성들의 선망을 받는 알파 메일이었다면 이 따위 사상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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