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는 꽤 다르게 생겼다. 아빠를 닮은 쌍꺼풀 없는 눈, 동그란 코. 엄마는 쌍꺼풀이 진한 눈과 높고 날카로운 콧대를 가졌다. 다행히 턱과 입매가 엄마랑 닮았다. 그래서 나와 엄마는 웃을 때 느낌이 비슷했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진심으로 웃을 일이 많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매년 겨울이면 추위만큼 마음이 얼어붙는다. 추운 날 목도리를 매고 갔던 외고 입시 시험. 큰맘 먹고 간 아웃백에서 울면서 반지를 주는 엄마. 어른들은 술을 더 마실테니 할머니 댁에서 자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겨울은 추웠다. 하얀 입김이 한숨보다 길어질 것 같은 온도에도 내 한숨이 언제나 더 길고 깊었다. 답답한 마음에 피기 시작한 담배 연기도 늘 내 한숨보다 옅었다. 기일이 다가오면 올해는 어떻게 보내게 될지 불안했다. 나는 자살유가족으로서도 독특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친정과 연을 끊은 40대 여성, 이혼한 지 10년이 넘은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이 치러주는 장례, 무뚝뚝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 밑에 혼자 남은 외동딸. 이게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엄마가 죽었으나 사실 원래 가족이 엄마와 나 밖에 없던 사람. 아빠도 나의 가족이었지만 엄마의 가족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자살은 늘 사회적 이슈였다. IMF 이후 급격히 늘어난 자살률은 사회적 문제였고, 200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된 연예인들의 잇따른 죽음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언론보도 방식이 바뀌고, 자살예방을 위한 지자체 예산이 늘고, 많은 지원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문제는 우리 엄마가 죽은 건 2008년이었다는 거다. 그 모든 변화가 아직은 이뤄지기 전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도 다 큰 어른이던 아빠도 도대체 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장례식을 애초에 3일간 치르지 못했다. 2일장으로 빠르게 끝내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학교에 알리지도 않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학교에 갔다. 첫 기일엔 고등학교 1학년 기말고사였다. 그냥 공부를 했다. 아빠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이후로 고등학교, 대학, 대학원까지 기일은 늘 내게 시험이거나 페이퍼 제출 기한이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했다.
아무도 연락 오지 않는 기일이므로, 나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누가 기억해주고 있을까라며 슬퍼하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또렷하게 기억했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연락이 없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매 기일마다 미용실에 갔다. 가서 머리를 자르거나, 염색을 하거나, 파마를 했다. 시험기간이라 시간이 없더라도 꼭 영양 클리닉도 같이 받았다.
미용실에 앉아서 기다리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왜 엄마를 뿌린 곳에 찾아가지 않고 미용실에 앉아있는 걸까?'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년 엄마를 찾아가는 대신 미용실에 갔다. 이제는 그게 나 나름의 애도의 방식이었다는 걸 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 조용한 의례. 머리를 하고 나와서 평소랑 다를 바 없이 셀카를 여러 장 찍어보고 제일 잘 나온 사진을 SNS에 업로드했다. 굳이 제사를 지내거나 찾아가지 않아도, 내 기억 속 나이에 비해 젊고 예뻐 보이던 엄마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방식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엄마에게 보여주는 자랑이기도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 나는 아빠에게 왜 연락하지 않냐고 물어보고, 같이 엄마를 뿌린 곳에 가달라고 했었어야 한다. 나도 제사를 지내고 싶다고 말했어야 한다. 가까운 친구나 애인에게 기일에 엄마를 보러 가자고 부탁했어야 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무게는 타인에게도 함께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이런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일이면 남편은 전전긍긍한다. 같이 엄마를 뿌린 곳에 들리면 어떻겠냐고 묻지만 난 늘 거절한다. 언젠가 가게 될 것을 안다. 아직 준비가 안된 것뿐이다. 이제는 엄마의 죽음 자체보다는 그 이후의 애도 과정에서 홀로 남겨진 고립감이 내게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어렴풋이 느낀다. 누군가 내게 괜찮은지를 살펴보고, 기일을 함께 보내주고, 엄마를 같이 추억해 주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조금은 다르게 자랐을 거다.
유가족 자조모임에서 알게 된 분이 제사를 올리든 혹은 비슷한 의식을 하든 제대로 된 애도를 할 수 있도록 기관을 연결해 주신다고 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할머니가 전며느리인 엄마를 위해 매년 절에 등을 달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죽은 정확한 이유도 모르시지만, 그래도 크게 위로가 되었다.
다른 자살 유가족들이 꼭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해낼 것이다. 기일에는 홀로 미용실에 가는 것 대신 남편과 엄마를 뿌린 장소에 함께 방문하기. 미용실은 새해맞이로 방문하기. 이제 막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지만, 가장 추웠던 그해 겨울을 생각하며 세우는 목표다.
브런치북 『그 흔한 생존자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연재됩니다.
지금은 2부 「남겨진 마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 개인 사정으로 다음 글은 7/11(금)이 아닌 7/15(화)에 올라옵니다.
다음 편에서는 엄마를 떠나보낸 후 제가 했던 다짐들을 적어보려 합니다. 글의 제목은 예고된 목차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