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들을 기억하나요? 애틋하기까지 한가요
지난 일들을 기억하나요
애틋하기까지 한가요
나는 잘 잊어버리거든요
행복해지려고요
- 브로콜리 너마저, '행복' 중에서
나는 기억력이 나빴다. 시험에 나오는 것들은 잘 잊지 않았지만, 그 외의 것들을 쉽게 잊었다. 사실 잊어버리는 게 좋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 기억을 굳이 되짚어보지 않는 게 나를 지키는 일 같았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썼고, 꽤 잘 해냈다.
자살유가족에게 고인과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일은 아픈 일이다. 다시 돌아가지 못해서 아픈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픈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가 살면서 어떤 순간에는 행복했던 게 맞는지 확신할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이게 자살유가족이 겪을 수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이다. 나도 모르게 엄마의 모든 삶이 불행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때 엄마는 분명 웃고 있었는데, 의심하게 된다. 모든 장면을 다시 되감아 재생해 보고, 새롭게 편집한다. 분명 함께 웃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 순간 모두 뒤에서 울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따라붙는다. 이 장면이 진짜 장면이 맞나?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다른 촬영본이 있는 것 아닐까.
'아마 울고 있었지 않을까? 내가 몰랐을 뿐.'
내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은 냉정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웃고 떠드느라 사실 그 사람이 아파서 죽어가고 있는 걸 몰랐다. 엄마의 웃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엄마를 떠올리려 노력하는 순간, 곧바로 엄마의 웃는 모습은 늘 가면이고, 사실은 울고 있었던 엄마가 등장한다.
엄마가 행복했던 기억은 늘 아저씨가 등장했다. 아저씨는 엄마가 연인으로 오래 만난 분으로, 내가 알기론 8년 정도 만났다. 먼저 삶을 떠났고, 우리 엄마가 뒤따라가는 데에 반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마 아저씨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 자세한 건 모른다. 그저 엄마가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엄마와 나 둘이서는 충분하지 않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억 속의 행복은 아빠, 엄마, 나거나 혹은 아저씨, 엄마, 나였다. 아빠와 내가 둘이서 행복한 순간은 분명 있는데, 엄마와 내가 행복한 순간은 이상하리만큼 희미하다.
전자사전을 선물하던 아저씨. 주황색 전자사전이었다. 함께 드라이브를 갔다가 불고기를 먹으러 간 날, 나는 처음 타보는 아저씨 승용차 뒷좌석이 온도 조절이 된다는 것을 신기해했다. 엄마는 더 좋은 차들도 세상에는 많다고, 아저씨는 부자가 아니라며 나를 보며 웃었다. 엄마와 내가 사는 집에 초대하여 집에서 월남쌈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파인애플을 넣어 먹을지 말지 고심하는 아저씨와 나를 보며 엄마가 웃었다.
엄마가 행복해하던 다른 기억은, 중학교 입학 전 아빠와 엄마랑 같이 중학교 입학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샀던 때다. 학교 규칙에 맞추어 검은색 가방과 운동화를 사던 나. 함께 스포츠 브랜드 매장을 둘러보는 아빠와 엄마. 엄마는 분명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날의 웃음이 엄마의 행복이었는지 나의 행복이었는지는 확신이 없다. 엄마와 나 둘이서 행복했던 시간은 있었지만, 내가 잊은 게 틀림없다고 스스로에게 우겨본다. 물론 있었는지 혹은 잊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모두가 이렇지는 않다. 분명 명확하게 함께한 행복이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저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므로 엄마와 함께 산 시간이 길지 않고, 그래서 함께한 추억이 적을 뿐이다. 함께 산 기억은 중학교 2학년 여름부터 1년 반 정도와 일곱살 때의 몇 장면이 전부로 매우 짧다. 그래서 엄마가 행복할 때 어떻게 웃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장면들도 행복이 맞았는지 다시 확인해 보고, 행복이면 그대로 두고, 행복이 아니면 컷 잘라내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러다 보면 엄마는 이제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장면들을 다시 확인하고 편집하면서 내가 엄마 대신 많이 울었으니까, 엄마는 이제 웃고 있을 게 틀림없다.
엄마 대신 내가 울었던 거라면, 내가 웃으면 엄마는 울게 되는 걸까? 아니란 걸 안다. 엄마와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 살펴보며 살아가던 2019년 어느 날, 브로콜리 너마저의 신곡 '행복'을 듣게 되었다. 행복해지려고 잘 잊어버린다는 노랫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엄마와 행복했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 지는 이미 10년이 지난 뒤였다.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기에는 그게 정말 행복했던 순간이 맞는지를 의심해야 했지만.
혼자 가만히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불러보았다. 잊어도, 잊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나간 장면들을 다시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재생해 보기로 한다.
브런치북 『그 흔한 생존자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연재됩니다.
지금은 2부 「남겨진 마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지나간 기일들을 다시 떠올려보려 합니다. 글의 제목은 예고된 목차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