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바디감을 가진 목소리 5대장

R&B 보컬리스트 특집

by Charles Walker

들어가며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당연한 이야기로 포문을 여는 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쓰게 된 글이기 때문에 물꼬를 이렇게 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순간 음악을 추상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꺼려졌다. 어떤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어느새 내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것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니 내 음악 보관함에 무려 수만 곡의 음악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게도 음악 취향이라는 게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 글을 준비하게 되었다.


고민을 많이 해 보았다. 기분 따라 어느 날은 록이나 메탈이 끌릴 때가 있고, 어떤 때는 가벼운 댄스 음악 같은 게 좋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기분이고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좋은 음악이 나의 베스트 넘버일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 결과, 이 다섯 사람이 물망에 올랐다. 이 다섯 사람의 공통점 두 가지는 R&B 음악을 한다는 것과 묵직한 바디감의 굵직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살펴보자.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 1951-2005)

박효신의 뮤즈이자 '완벽한 목소리'로 아직도 극찬을 받고 있는 미국의 R&B 보컬리스트, 루더 밴드로스이다. 1981년, 솔로 1집 [Never Too Much]로 화려하게 씬에 나타난 그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창력으로 대중들의 귀와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루더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가 피아노 앞에 앉아 몸을 뒤흔들며 열창하는 모습과,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온갖 화려한 퍼포먼스로 대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모습을 함께 떠올려 보자. 그들과 비교하여 루더는 무대에서 그냥 오로지 '노래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비나 마이클의 '퍼포먼스'를 곁들인 무대와 같은, 아니 어떨 때는 그것들을 능가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루더의 진가는 음원보다는 라이브에서 더욱 빛난다. 루더는 같은 노래를 불러도 음원과 결코 똑같이 부르지 않는다. 그날의 분위기와 컨디션에 따라 새로운 느낌과 액센트를 노래에 가미하는데, 그게 기가 막힌다. 루더가 첫 소절을 내뱉을 때, 대중들은 그 목소리에 일단 자지러지는 소리를 낸다. 마치 우리나라의 조용필이 '기도하는~'이라고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소녀들이 '꺄악~'하고 내지르는 것처럼, 루더는 모든 무대에서 그 상황을 연출한다. 일부러 연출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루더의 목소리는 힘이 세다. 아래는 루더 앨범들 중에서 베스트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목록이다.

1. Never Too Much (1981)

루더 밴드로스의 데뷔 앨범으로, 공전의 히트곡 'Never Too Much'를 비롯하여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의 원곡을 재해석한 'A House Is Not A Home', 유머러스한 훵크 넘버 'Sugar and Spice', 흥겨운 리듬이 인상적인 'I've Been Working' 등을 추천한다.


2. Give Me The Reason (1986)

이 앨범에 유독 명곡이 많은데, 앨범의 포문을 여는 흥겨운 리듬의 'Stop To Love'를 비롯하여 앨범 타이틀과 동명의 신나는 곡 'Give Me The Reason', 눈부시게 아름다운 발라드 'So Amazing', 느리고 장중한 곡조의 'Anyone Who Had A Heart'이 특히 좋다.


3. Any Love (1988)

나는 이 앨범의 타이틀곡인 'Any Love'로 본격적인 루더 덕후 생활을 시작했다. 이 곡은 전형적인 R&B와 그 무드를 완전히 달리하는, 아름답고도 어딘가 신비한 구석이 있는 곡이다. 그 밖에도 절창의 가창력이 극도로 드러난 'Love Won't Let Me Wait'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 곡은 2003년 발매된 라이브 앨범 버전을 반드시 들어보기 바란다. 미친 라이브를 선보인다.


4. Songs (1994)

이 앨범은 루더의 리메이크 앨범인데,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 앨범이 바로 루더 밴드로스의 커리어 하이(Career High)라고 생각한다. 가창력은 물론이거니와 원곡을 훌쩍 뛰어넘는 재해석 능력까지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다. 이 앨범은 어느 특정한 곡을 추천하기 어려우므로 전곡을 반드시 정주행하기를 권한다.


5. Luther Vandross (2001)

솔로 데뷔 20년 만에 셀프 타이틀을 내걸고 발표한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는 젊은 팬들을 사로잡으려는 거장의 노력이 엿보인다. 트렌디한 사운드와 루더의 가창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듣기 좋은 바이브를 만들어낸다. 첫 트랙 'Take You Out'도 멋지고, 국내에도 꽤나 알려진 아름다운 멜로디의 발라드 'I'd Rather'도 좋다.


6. Dance With My Father (2003)

본의 아니게 유작이 되어버린 앨범이다. 이 앨범을 준비하고 내놓을 시점부터 루더는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평소 폭식증과 당뇨 등 건강이 나빴던 루더는 이 앨범을 발표하고 공연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건재함을 알렸으나, 불과 2년 뒤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떠나기엔 아직 이른 나이였는데 너무나 안타깝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인 'Dance With My Father'에서처럼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멋들어진 춤을 추고 있을 루더 밴드로스가 무척 그리워진다.


피보 브라이슨 (1951-)

피보 브라이슨은 1951년 4월 13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린빌에서 태어나 1976년 앨범 [Peabo]로 데뷔한 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까지 현역 가수로서의 커리어를, 그것도 매우 뛰어난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디즈니의 총애를 받은 가수(?)로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알라딘의 OST로 유명한 'A Whole New World'를 부른 그 사람 맞다. 이 밖에도 미녀와 야수의 OST인 'Beauty And The Beast'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즐겨 본 사람이라면 이 목소리만큼은 분명 익숙할 것이다.


Roberta Flack - Softly With These Songs: The Best Of Roberta Flack (1993)

내가 결정적으로 피보의 목소리에 꽂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베스트 앨범을 들으면서이다. 로버타 플랙 또한 R&B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보컬리스트이기에 공부하는 마음으로 아주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7번 트랙으로 수록된 'More Than Everything'에서 소위 '뻑'이 가 버렸다. 두 사람의 환상적인 호흡도 물론이거니와, 피보 브라이슨이 그려내는 수려한 애드립 라인, 그리고 무엇보다 멋들어지면서도 밀도감 높은 고음이 아주 일품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피보 브라이슨의 존재감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구나, 하는 뼈저린 회한과 반성의 시간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피보 브라이슨의 앨범을 차례대로 하나씩 들어보았다. 아래에 My best를 추가한다.


1. Reaching For The Sky (1977)

피보의 앨범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앨범이다. 디즈니 풍의 아름다운 R&B 발라드만 부르던 가수인 줄 알았는데, 커리어 초창기에는 완연한 훵크&소울 넘버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그야말로 '진짜' 흑인음악 뮤지션이었던 것. 마치 정체를 숨기고 있던 스파이의 실체를 밝혀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타이틀곡 'Reaching For The Sky'를 비롯하여 소울 그루브가 넘실대는 명곡이 즐비한 앨범.


2. Crosswind (1978)

이 앨범은 단 한 곡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하다. 바로 'I'm So Into You'이다. 전작인 [Reaching For The Sky]의 그루브감은 유지하되, 조금 더 로맨틱한 무드가 가미된 느낌이다.


3. Paradise (1980)

이 앨범이 피보 브라이슨의 훵키 소울 스타일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다시 말해 초창기 커리어의 종지부를 찍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앨범 이후 발표하는 [I Am Love (1981)]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로맨틱 무드의 피보 브라이슨으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한다.


4. All My Love (1989)

피보 브라이슨 음악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아름다운 멜로디'이다. 곡 자체가 가진 멜로디가 수려하고 아름답기에, 표현력이 뛰어난 보컬리스트인 피보 브라이슨을 만나면 그 멜로디의 힘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들을 듣다 보면 그런 생각이 참 많이 든다.


5. Can You Stop The Rain (1991)

개인적으로 피보 브라이슨 최고의 아웃풋이라고 생각하는 앨범인데, 특히 앨범 타이틀과 동명의 곡인 'Can You Stop The Rain'을 듣다 보면 숨이 멎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곡 자체는 그저 시류에 따라 만든 평범한 R&B 발라드인데, 피보 브라이슨이 불러냄으로써 곡의 생명력이 극대화되었다. 특히 후반부에 휘몰아치는 애드립은 정말 압권이다.


6. Stand Up For Love (2018)

가장 최근에 발표한 피보 브라이슨의 정규 앨범. 역시 젊은 층의 대중들을 사로잡기 위해 트렌디한 사운드를 가미했고,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목소리를 과시하며 놀라움을 선사했다.


제임스 잉그램 (James Ingram, 1952-2019)

앨범에서의 파워는 앞서 소개한 두 보컬리스트들에 비해 다소 약하지만, 제임스 잉그램만이 가지고 있는 스페셜리티(Speciality)는 분명하다. 안쪽으로 먹어 삼키는 듯한 동굴 목소리로 노래하다가, 별안간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두성 고음을 난사하는 제임스는 목소리로 서커스를 하는 듯한 분위기의 뛰어난 보컬리스트이다.


Greatest Hits : The Power of Great Music (1991) / Forever More : Love Songs, Hits & Duets (1999)

제임스 잉그램은 두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는데, 같은 곡이라도 버전이 약간 다르다. 즉, 1999년에 발표한 앨범의 곡들은 재녹음 버전이라는 것이다. 베스트 앨범인 만큼 모든 곡들이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베스트를 뽑아 보자면 한국인들에게도 무척 익숙한 곡인 'Just Once'를 비롯하여 패티 오스틴(Patti Austin)과 함께한 'How Do You Keep The Music Playing', 두성 고음 애드립이 빛나는 'I Don't Have The Heart', 아름다운 멜로디의 R&B 발라드 'There's No Easy Way', 1999년 앨범의 신곡인 'Forever More'를 추천한다.


조니 길 (Johnny Gill, 1966-)

묵직한 바디감 하면 그룹 뉴 에디션(New Edition) 출신의 걸출한 보컬리스트 조니 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루더 밴드로스를 가장 존경한다고 하며, 본인의 음악에서도 루더의 창법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포스트 루더 밴드로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포스트 루더 밴드로스답게, 조니 길 또한 라이브에서 그 진가를 확실히 발휘한다. 조니 길의 열창을 듣고 있노라면 저러다 몸이 부서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며, 동시에 조니 길 정도의 피지컬이니까 저걸 버텨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러나저러나 엄청난 역량의 보컬리스트인 것만은 확실하다.


Favorites (1997)

조니 길의 베스트 앨범, [Favorites]이다. 개별 앨범을 듣는 것보다는 이 앨범 한 장으로 입문하여 라이브 무대를 최대한 많이 찾아보는 게 조니 길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일 것이라 생각한다. 추천곡은 'My, My, My', 'Quiet Time To Play', 'Let's Get The Mood Right'이다.


도니 해더웨이 (Donny Hathaway, 1945-1979)

사실 앞에 소개한 모든 보컬리스트의 뿌리를 좇아 올라가면 이 사람이 나온다. 바로 도니 해더웨이이다. 서른 넷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갔던 도니는 깊은 우물 같은 음색을 지닌, 그야말로 소울 음악의 표현에 특화된 보컬리스트였다. 그가 생전에 남긴 앨범은 라이브 실황 앨범과 로버타 플랙과의 듀엣 앨범을 포함하여 총 다섯 장으로, 아래와 같다.

1. Everything Is Everything (1970)

도니 해더웨이의 첫 번째 앨범으로, 게토 소울(Ghetto soul)을 표방하여 흑인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표현하였다. 'The Ghetto', 'I Believe To My Soul',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을 추천한다.


2. Donny Hathaway (1971)

이 앨범에 명곡이 정말 많다. 내가 도니 해더웨이 노래 중에 가장 좋아하는 'A Song For You'를 비롯하여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Put Your Hand in the Hand', 'Be There', 'This Christmas'를 추천한다.


3. Live (1972)

도니 해더웨이의 라이브 공연 실황 앨범으로, 마빈 게이(Marvin Gaye)의 명곡 'What's Going On?'으로 공연의 문을 열어젖히는 포인트가 인상적이다. 'Little Ghetto Boy'도 필청 트랙.


4. Roberta Flack & Donny Hathaway (1972)

로버타 플랙과의 듀엣 앨범. 로맨틱한 소울 발라드와 훵크 그루브가 넘실대는 명반이다. 캐롤 킹(Carole King)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You've Got a Friend', 아름다운 하모니가 인상적인 'Where Is The Love'를 추천한다.


5. Extension of a Man (1973)

도니 해더웨이의 생전 마지막 앨범으로, 'Flying Easy'와 같은 아름다운 곡들이 정말 많이 수록된 앨범이다. 이 밖에도 'Love, Love, Love', 'Someday We'll All Be Free', 'Valdez in the Country' 등을 추천한다.



나오며


이 글을 쓰면서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음악을 아주 많이 좋아하고, 특히 무게감 있고 선이 굵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표현한 R&B 음악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물론 어느 날 어느 때의 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 끌리는 음악이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나의 음악적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광활한 음악의 바다를 정신없이 헤엄치다가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해안가의 집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언젠가는, 먼 훗날의 언젠가는 나도 이 사람들처럼 멋진 노래와 음악을 표현하는 뮤지션이 되어 세상에 아름다운 에너지를 전파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 원고는 이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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