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할 것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쓰면서,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남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쉽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 이유는... 나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그렇겠느냐마는 세상 사람들 중에 적어도 7할 정도는 나를 잘 모르는 채로 살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를 새삼 글로 펼쳐 놓고 나니 세 가지 키워드가 남는다. 바로 음악, 책, 그리고 교육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다루고 싶지 않고 소홀해지게 두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다. 지금은 병마와 싸우며 잠시 엎드려 있지만, 나는 다시 나의 일터로 돌아갈 것이다. 병가를 처음 내고 쉬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를 수도 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교사 일 말고는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농사를 지을까도 생각해 보았고, 트럭을 구해다 과일 장사를 해 볼까, 도배 기술이나 입주 청소 같은 걸 배워서 이삿짐센터에서 일해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려고 들든 간에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어떤 일이든 나이가 애매하게 많거나 적었다. 그리고 결국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던 일을 그만하려고 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똑똑하게 일터에서 나를 지키며 일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생산적이라고 나 스스로를 정리했다.
원고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책 두 권을 소개하려 한다. 허서진 선생님의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인데, 현직 국어 교사가 쓰신 책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갔고, '여전히 학교에는 희망이 있다, 사랑이 있다'라는 캐치프라이즈가 왠지 나에게는 환상처럼 느껴져서 저절로 이 책에 마음이 이끌렸다. 두 걸음이나 앞서 간 마음은 결국 이 책을 손에 넣게끔 했고,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야 했다. 허 선생님이 학교 현장에서 겪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모든 장면이 마치 꿈은 아닐지, 아니라면 책을 읽고 있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지 확인해야 해서 말이다.
책에 묘사된 허 선생님의 교직 생활은 비단길 같아 보였고(물론 크고작은 시련이 없진 않았지만), 그에 비해 나의 교직 생활은 단조롭고 숨막히는 철창 생활 같았다. 그 괴리감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교사로서의 역량 차이? 학교 환경의 차이? 아니면 마음가짐의 차이?
허서진 선생님이 강의형 수업을 지양하고 활동형 수업을 과감하게 시도하시는 저력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활동형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본인은 강의형 수업을 이끌고 갈 능력이 부족하고, 자신의 수업 방식을 이해해 준 동료 교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겸양의 말씀을 덧붙이긴 하셨지만 그러한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교사의 흔들리지 않는 철학이 없다면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활동형 수업은 불가능하다. 책 내용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서 함께 보려 한다.
...국어 교과의 '본질' 같은 허상보다는 고득점을 위한 '효율성'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게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도.
다른 말에는 흔들리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말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수능이 너무나 중요한 시험이고 입시는 고등학교 생활의 종착지였다. 나도 그 시험을 거쳐 교사가 되었고 아이들도 그 시험을 무사히 거쳐 무언가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본질을 고민한답시고, 아이들의 필요를 무시해도 되는 걸까. 본질과 필요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졌다.
본책 p.126~127
이 구절이 어찌나 마음에 와 닿는지, 세상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교사가 또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렇다. 우리도 점수보다는 '삶'을 지향하는 수업을 하고 싶다. 입시와 수능의 굴레에서 벗어나 문학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국어의 문법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때로는 예술적인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교육의 획일화는 교사가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한 시스템의 힘이 압도적으로 크고, 그 앞에서 교사는 무력하다.
하지만 허 선생님처럼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위에 부딪치는 계란도 있다. 부서질지언정, 깨질지언정 조그마한 균열이라도 내어 아이들에게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숭고하다. 본질과 필요의 균형 있는 양립을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경이롭다. 나도 허 선생님처럼 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면, 대답은 No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다가는 내가 부서질 것 같다. 그렇게 하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참교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나중에 내 역량이나 그릇이 좀 더 커진다면 모를까.
허 선생님이 고등학교에서 활동형 수업을 과감하게 시도한다고 앞서 밝힌 바 있다. 시스템을 아는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이는 무척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자칫하면 악성 학부모로부터 민원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다. 우리 아들딸은 수능 공부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활동 수업을 왜 하냐며, 그런 방식의 수업은 지양해 달라는 식의 민원 말이다. 말이 독하기는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말하는 학부모를 원망할 수도 없다. 이렇게 말하도록 만드는 교육 시스템이 문제라면 문젤까. 허 선생님은 이러한 고민의 흔적을 아래와 같이 술회한다.
아이들에게는 삶을 다루는 수업만큼이나 좋은 점수가 필요하다. 교육으로 유리 천장을 뚫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교육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특히 현재의 삶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좋은 대학, 좋은 직장만큼 극적인 전환점은 없다. 나 역시 교육이라는 전환점을 통과하여 결핍으로 점철되었던 세월에서 벗어났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결국 좋은 점수가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의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본책 p.283
앞서 허 선생님의 고민은 이 책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장강명, 이기호 등 사회에 대한 날카롭고 통렬한 시선을 갖춘 14명의 소설가가 모여 집필한 동인 소설인 <킬러 문항 킬러 킬러>이다. 이 14편의 단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교육'이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모든 단편이 다 좋았지만, 대표작인 장강명의 <킬러 문항 킬러 킬러>만 조금 언급해 본다.
장강명의 '킬러 문항 킬러 킬러'에 나오는 '킬러 문항 킬러'는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를 가리킨다. '국가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킬러 문항을 출제하는 행태를 당장 멈추라'는 대통령의 명을 받고 수능 출제 요원을 교체하고 킬러 문항 배제를 위해 움직이는 교육부 말이다. 그들을 죽이는 '킬러'라는 말이다. 과연 누굴까? 아니, 뭘까?
킬러 문항 킬러 킬러는 사람이 아니다. 주황색 알약 하나다. 이 약 하나면 긴장하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하며 시험장에서 평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약을 구하기 위해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온갖 부정부패와 암투가 벌어질 것이고, 세 시간으로 효과가 짧은 국산보다 무려 열두 시간이나 효과를 지속할 수 있는 미제 서방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억만금을 줘도 모자라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이 약을 구해 왔다. 수능 당일 아침, 학생은 약을 먹으라는 부모의 강요에 응하지 않고 버틴다. 정정당당하지 않다고. 게임 시스템이 불합리하다고 해서 반칙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얼마나 똑똑한 학생인가? 하지만 부모는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너는 긴장하면 실력 발휘를 못한다고. 부모 마음도 알 것만 같다. 오죽 답답하면 약을 구해 왔을까? 그걸 구하기 위한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분명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 학생 앞에 앉아 있는 게 기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은 부모의 암투를 모른다. 아니, 어렴풋이 알지는 몰라도 그에 순순히 응하고 싶지 않다.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양심(良心)'. 직역하면 '좋은 마음'이다. 학생의 마음도 좋은 마음이고, 어찌 보면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도 좋은 마음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이 학생의 부모를 가리키며 양심이 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반면 학생은 양심이 있다고 평가받을 것이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그리고 양심은 왜 중요할까?
앞서 내가 장강명의 작품이 남다르다고 말했던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강명은 이 작품을 통해 질문을 제시했다. 그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특히 교육의 위기를 뚫고 나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말이다. 바로 '양심의 문제'이다.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이런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독자가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 말이다.
여러분이 학부모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루에 한 번 치는 그 시험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달려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그 주황색 알약을 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 않겠는가? 나는 잘못 살았어도, 내 자식만큼은 나처럼 되도록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온갖 암투와 부정의 늪으로 거침없이 뛰어들려고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우리들 모두가 이러한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교육하는 것이 미래의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인지를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교사에게만 지나치게 맡겨만 놓지도 말고, 또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아이들을 이끌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주체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학부모도, 동료 교사도, 관리자도.
이제 이 원고도 이렇게 마무리하려 한다. 어느덧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두 권이나 되었다. 마무리가 어째 좀 뒤숭숭하게 흘러간 감이 없지 않은데, 그래도 독자님들에게 '나 괜찮아요' 하고 안심시키기 위한 메시지로 어떤 키워드가 가장 좋을까를 생각했을 때 셋 중에서는 교육이었다. 정말 다시 돌아갈 것이기도 하고, 돌아간다면 예전의 그 샌드백처럼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다니는 교사로 살지는 않을 테니까. 돌아가도 괜찮다고 독자님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게 내가 독자님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긴 글을 꾸준히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감사와 사랑을 끌어모아 전한다. God bless you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