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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Nov 30. 2023

네가 택배 가지고 들어온 줄 알았어!

기념일 1

  이번 기념일은 감회가 남달랐다. 연애하는 동안 우리는 기념일을 단 해도 함께 하지 못했다. 영상통화로 초를 꽂은 조각케익과 기념일을 축하하는 카드를 읽으며 보내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지난 기념일들을 나름 귀엽게 보내왔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서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것에 속상함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이번 기념일부터는 매년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 거창하게 준비할 건 없지만 기념일 케익을 직접 만들어 준비하고 싶었다. 너로 정했어 당근 케익!

  기념일 당일까지는 R에게 비밀로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조용히 필요한 재료와 베이킹 도구를 나눠서 구매하고 있었다.

  언젠가 필요하지만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천천히 구매하고 있기 때문에 채칼이 아직 없었다. 채칼 없이 만드는 당근 케익을 상상해 보았는가. 상상만 해도 손목이 욱신거린다.

  주문한 채칼은 각휴지 커버와 함께 기념일 되기 3일 전 정도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녀올게!'

  택배 도착 예정일은 자전거 타는 날이었는데 자전거를 끌고 나가보니 우리 택배로 보이는 박스가 차고 앞에 놓여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게이트는 가장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보통 기사님들은 집 중앙에 있는 차고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놓고 간다.

  2시간 정도 후면 집에 도착할 테니 집 들어가면서 택배 가져가면 되겠다! 속으로 생각하고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택배박스가 보이지 않았다.

  '오? R이 택배 가지고 들어갔나?'

  아마존으로 주문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을 R도 봤을 거다.


  'Did you bring in the package?'

  R로부터 들은 대답은 'No'..  이게 무슨..?

  자전거 타러 나가면서 우리 택배가 온 걸 봤다고 말하니 R이 밖으로 나가 한동안 택배를 찾아다녔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택배를 결국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들어와야 했다.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많은 살림살이를 사야 했다. 그래서 아마존에서 꽤 많은 것들을 주문해 왔고 그날 전까지는 택배를 도둑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단 2시간 만에 택배를 도둑맞을 수도 있구나..

  처음에는 난생처음 겪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이가 없고 화났다. 그냥 내가 택배상자를 들여놓고 자전거를 탔으면 좋았을 걸. 이 생각은 메아리치듯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몇 시간 동안은 그 생각에만 갇혀있다가 '택배가 도둑맞는 바람에 누가 가장 손해인가.'라는 생각에 도달했을 때 한 숨을 푹 쉬었다.

  그 말은 더 이상 채칼은 없고 그 많은 당근을 손으로 직접 채 썰어야 한다는 거다..  R.I.P 내 손목..

  위층에 사는 관리자 부부에게 택배를 도둑맞은 일이 이 집에 종종 생기는지 물어봤지만 적어도 그들이 사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에휴 그냥 운수 좋은 날이었다고 생각하자.

  다행히도 택배를 도둑맞은 이후로 아직까지 또 도둑맞은 적은 없다. 왜냐 택배 도착 예정일이면 그날 아침부터 송장번호 조회를 계속하며 도착되자마자 현관문을 뛰쳐나가듯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

  그래도 비싼 물건을 도둑맞은 게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얻어 본다. 가만, 우린 비싼 물건을 산 적도 없으니 비싼 물건을 도둑맞을 일이 없는 거지.


  당근을 채 써는데 역시나 손목을 꽤나 힘들었다. 뭐, 케익은 맛있게 잘 나왔으니 기분은 괜찮았다. 손목은 스트레칭도 주물러주기도 하니 금방 회복됐다.

  R 몰래 사온 기념일 카드, 숫자초, 케익 위에 레터링 할 아이싱 슈가가 엉성하기 짝이 없이 써진 것까지 완벽한 준비였다.

  소란스럽고 귀여운 집의 가장 좋은 점은 언제 출시 한지 모를 만큼 오래되어 보이지만 제대로 작동해 주는 스토브다. R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앞으로 있을 수많은 기념일만큼은 직접 구운 케익을 함께 즐기며 잔잔하게 보내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괜찮잖아. 케익을 는 달달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울 때 곧 우리가 케익을 맛있게 함께 먹을 순간을 기대하면서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이 따듯한 이미지가 좋아서 상상해 오던 베이킹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게 행복하다.


  아참, 채칼은 나중에 다시 주문했고 이번엔 잘 받았다. 다음 당근케익을 만들 땐 손목이 아프지 않아도 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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