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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Nov 27. 2023

You want to race?

그런 날 1

  '다녀올게!'

  꼼꼼히 바른 선크림 위에 연분홍을 띈 선글라스를 낀다. 최대한 눌러쓴 모자가 강렬한 한낮의 볕을 조금이라도 가려주길 바라며 양손에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을 나선다.

  R이 출근하거나 학교 갈 때 창밖으로 복실이와 배웅을 하는데 내가 자전거 타는 날에는 R이 복실이와 배웅을 해준다. 조심히 자전거 타고 오라는 R의 말을 뒤로하고 우리 집 창문 앞에 묶어둔 자전거를 끌고 긴 담을 지나 게이트를 열고 이 집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커다란 쓰레기통으로 간다.

  언덕진 곳에 있는 집이라 혹여나 자전거가 도로 쪽으로 미끄러지지 않게 받침을 잘했는지 확인 후 쓰레기를 휙 버리고 뚜껑을 닫으니 갑자기 낯선 이가 왼쪽에서 나타났다.

  중동계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억양을 들어보니 미국인 같진 않았다. 이 집 뒤쪽에 공원이 있는지도 잘 몰랐는데 이 집을 끼고돌면 뒤쪽에 공원이 나오는지 물어본다.

  그의 첫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다. 그리곤 그의 질문을 이해했으나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의 정보가 내겐 없었기에 도움이 될 만한 답변을 주진 못하고 낯선 이와 나는 제 갈길을 갔다.

  집 앞에 있는 일 차선을 따라가다 보면 사거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시원한 내리막길이 보인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속도감 있게 미끄러지는 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라이딩의 기분을 애피타이저처럼 돋궈준다.

  손가락을 살짝 힘줘 브레이크를 잡으며 나에게 너무 빠르지 않은 속도를 맞춰 바람을 가르며 내리막을 내려가다 보면 또 다른 사거리가 나온다.

  오늘은 미술관을 가보려 한다. 하와이를 주제로 현지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라 호기심이 자극 됐다. 익숙한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니 미술관이 나왔는데 자전거 묶어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조금 헤매다가 결국 미술관 앞의 가로등에 잘 묶어 놓고 들어 간다.

  십여 년 가까이 되는 예전 일이지만 한국에서 내 돈으로 처음 산 청록색 자전거를 며칠 만에 도둑맞은 이후로 생긴 안전 과민증이 자전거를 가로등에 덩그러니 묶어 놓고 가려니 발동했지만 '설마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얼버무렸다.

 

  'May I help you?'

  1층 로비 인포메이션에 앉아있는 중년의 가드가 나를 보며 물어본다.

  미술관 방문했다고 하니 전시장은 1층 뒷문으로 나가면 정원과 2층의 갤러리로 준비되어 있고 네가 편한 대로 2층을 갈 땐 앞 쪽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는 설명을 해준다. 알고 보니 이곳은 미술관만 있은 게 아니라 1층에는 사무용 공간으로 방문객에게 개방되지 않은 곳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건물의 어느 곳이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망설임 없이 뒷문으로 걸어가 문을 연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던 흐린 날의 후텁지근한 낮 공기가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스친다. 우중충해서 차분해진 미술관의 뒤뜰에는 이미 몇몇의 방문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이름 모를 식물들과 작품들을 둘러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뒷문을 열고 뒤뜰 정면으로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면 흙먼지가 잔뜩 껴서 제 색을 내지 못하는 차양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 서서 마음에 드는 오래된 미술관 건물을 한동안 바라본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도 몇 장 찍었다. 핸드폰을 주섬주섬 챙겨서 차분한 공기를 가로질러 내리는 빗방물을 맞으며 실내로 들어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 탁 트인 베란다가 나온다. 현대적이지 않은 건물의 베란다에는 낭만이 넘실댄다. 거칠면서도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벽돌에도.

  베란다에 서서 미술관 앞에 촘촘한 초록 잔디 위에 조형물을 보며 괜히 은은한 미소를 띠며 구경하다 뒤돌아 2층 미술관 출입문을 연다. 물론 2층 미술관을 들어가기 전에 가로등에 자전거가 여전히 잘 있는지 확인도 했다.

  얼마만의 미술관인지. 둥둥 들뜬 마음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가드가 있었고 들고 간 물병은 보관함에 맡긴 후 관람을 할 수 있다기에 물병을 맡기니 가드는 매직으로 같은 번호를 적은 나무집게 두 개를 꺼내 한 개는 물병에 한 개는 내 손에 쥐어준다. 귀엽네.

  'Fear of the Unknown'

  왼편에 있는 전시장 입구의 문장을 지나 작품들을 둘러본다. 작품을 비추는 누르스름한 조명으로 채워진 전시장에는 내 발자국 소리만 자그맣게 들릴만큼 한산하고 조용하다. 작품설명도 꼼꼼히 읽는 편이라 여기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영어로 된 작품설명을 다 읽으면서 작품을 보려면 일주일 동안 미술관에 매일같이 와도 못 끝낼 것 같아서 작품위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여유롭게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모든 작가들에게 존경을 남기며 물병을 찾아 1층으로 내려간다.


  'Excuse me?'

  낭만이 넘실대는 미술관을 뒤로하고 자전거로 향했을 때 모르는 책이 자전거 안장 위에 놓여있었다. 내 자전거를 뒤로한 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낯선 이의 것으로 보인다. 해그리드만큼이나 덩치가 있는 그가 뒤돌아 나를 발견하고 책을 가져가며 민망했는지 사과하며 내가 방금 나온 건물의 정체를 묻는다.

  폴리네시안계로 보이는 그와 미술관 관람을 즐겁게 했다는 스몰토크를 끝내고 자전거에 올라 타 알라 모아나 해변으로 향한다. 알라 모아나 해변으로 가는 길은 자전거 도로가 따로 없어서 조금 불편하지만 밖에 나온 김에 좋아하는 해변을 보고 싶었다.

  해변에 거의 다 다른 나는 알라 모아나 공원으로 가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자전거를 세운다. 그러다 왼쪽 코너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자전거 하나와 부딪칠 뻔했는데 그는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며 갑자기 스몰토크를 시작한다.

  'Are you want to race?'

  처음에는 레이스라는 말이 인종을 뜻하는 단어인 줄 알고 무슨 말하는 건지 몰라 다시 물었고 해변까지 자기네들과 경주를 하겠냐고 물었던 거다. 오늘따라 스몰토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이 날처럼 낯선 사람들이 가는 장소마다 말을 걸어오는 경험은 처음 해본다. 나는 괜찮다는 대답에 '왜? 같이 경주하자! 내 자전거 손잡이가 끈적거려서 테이핑을 다시 해야 했어!'라며 계속 말을 걸길래. 짧은 대답을 하며 웃었지만 바로 정면을 응시하여 관심 없다는 태도로 신호를 기다렸다.

  그들은 갑자기 'Oh It's my time! The beach is waiting for me!'라고 외치며 여전히 빨간불인 신호등을 잽싸게 가로질러 무단횡단하며 해변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신나게 달렸다. 지금도 그가 어떤 신호를 보고 횡단보도를 건넌 건지 의아하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그들은 많이 들떠 보였다. 이 상황이 조금 재밌네 생각하며 드디어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에 나도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해변 공원 산책로를 지나 해변에 도착해 풍경을 보며 물도 마시고 잠시 벤치에 앉아 쉰다.

  연한 하늘색과 진한 파란 바다가 반짝거리며 일렁이는 풍경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움 뿐이다. 어떻게 알라 모아나 해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숨이라도 깊게 들이마시며 해변 냄새를 가득 안고 집으로 향하는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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