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다 저물어서 거실이 어둠 속에 완전히 파묻히자, 소년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어스름한 빛 아래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는 할아버지의 굽은 등이 드문드문 빛났다. 소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고 늙어 보이는 모습을 보자, 순간적인 서늘함이 소년의 가슴을 스쳤다.
소년이 정원에 온 것을 느꼈는지, 할아버지는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묵묵히 손바닥의 흙을 털면서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중요한 것을 찾으러 나왔다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그 말이 소년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이 집에 들어와 감자 수프를 먹고 잠든 뒤로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소년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여긴 너무 숲 속이라서… 뉴트리팩 배송이 안 오나요?”
할아버지의 얼굴에 잠시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란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찾지도 않지.”
그 후, 할아버지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감자수프를 끓였다. 소년은 후후 불어가며 또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할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가끔씩 소년이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는 온몸을 흔드는 거친 기침과 한참을 싸우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르며 손수건을 내렸다.
그 천 위에는 검붉은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사래를 쳤다.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많이 살았다.”
짧은 대답 뒤, 할아버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묘한 온기와 피로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지?”
“네.”
“그걸 찾으러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들어다오.”
“부탁이요?”
“내일 아침에 말해주마. 어서 자렴.”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인해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미션이 떠올랐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이 지금 '금지된 가출' 중이며, 가능한 한 빨리 X박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잊고 있던 미션이 소년의 마음속에서 계속 빨간 불을 깜빡이고 있는 걸 소년은 다시금 깨달았지만, 붉은 피를 토하는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거절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소년은 식사를 마친 뒤, 할아버지가 길어준 물로 대충 몸을 씻고 다시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거실 쪽에서는 할아버지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말수가 적고 퉁명스러운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곁에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낯선 집에 누워 있는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 곁에 있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잠자리에 눕자, 소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이 깊은 숲 속에서 할아버지는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지내온 걸까. 무슨 이유로 하루 종일 정원을 가꾸는 걸까. 왜 병원에도 가지 않고, 고통을 그토록 묵묵히 견디고 계신 걸까. 이해되지 않는 일들뿐이었다. 도대체 내일 자신에게 어떤 부탁을 하시려는 건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워서 그런 의문조차 떠올리지 못했었다.
소년은 문득, 자신이 떠나온 ‘현실세계’가 오히려 꿈이 아닐까 하는 몽환적인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이 점점 회오리처럼 머릿속을 빙빙 돌며 커지다가 희미해지는 순간, 소년은 깊은 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다음 날 아침, 따뜻하고 포실포실한 냄새에 소년의 눈이 떠졌다.
부엌으로 가보니, 갓 쪄낸 감자들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소년은 뜨거운 감자를 후후 불어가며 먹은 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할아버지가 작은 화분 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이 화분을 전해주면 된다. 주소는 여기 있다.”
소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여기 지도에 표시해 주실 수 있나요?”
소년이 주머니에서 접혀 있는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래, 어디 보자…”
할아버지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
“보건국이 이쯤이겠구나. 바로 이쯤이 이 집이고.”
그는 창밖을 가리켰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첨탑이 북쪽이야. 그 방향으로 걸어서 숲을 벗어나면 된다.
거기부터는 어렵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거기 가서 ‘유현 박사’를 찾으면 된다.”
할아버지는 소년에게 손을 흔들며 또다시 기침을 했다. 소년이 걱정스레 뒤돌아보자, 할아버지는 힘겹게 손을 들어 빨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건강하세요.’
‘다시 봐요.’
‘감자수프 정말 맛있었어요.’
‘재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런 말들이 소년의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 중 단 한마디도 소년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깊은 숲을 벗어나 다시 도시로 향하는 길 내내, 소년의 마음 속에 있는 깊은 연못이 끝없이 찰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