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도망 중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처음 왔을 때부터 감정을 배출하면 벌을 받았어요. 울거나 떼를 쓰는 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하면 보통 양육자는 표현을 멈추길 강요하거나 공포심을 일으켜 훈육을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의 배출은 우리에게 보호자의 사랑을 앗아가는 생존의 위협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응을 하는 게 아니라 도피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때로는 도망친 곳이 더 괴롭지 않나요?
누구나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곳이 있죠. 싫은 감정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왔는데 고대로 당하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에겐 음식이, 어떤 사람에겐 술이, 어떤 사람에겐 약물이 비상구가 되어줍니다.
저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당 중독자예요. 과자, 초콜릿, 아이스크림... 뭐가 됐든 설탕이 들어간 거면 됩니다. 불안해도 먹고 우울해도 먹고 심심해도 먹게 돼요.
제가 어릴 때 엄마는 군부대 앞에서 매표소를 하는 고모를 자주 도왔다고 해요. 4살의 저는 매표소를 찾은 군인 아저씨들한테 하도 과자를 얻어먹어서 신제품을 다 통달할 정도의 과자 마니아였다는군요. 제 중독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었어요.
설탕은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롭고 행복했던 저의 유년시절을 대표하게 되었고 저는 삼십 년이 지나도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근데 먹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지가 않아요. 인슐린 탓인지 피곤하고 목이 마르고 몸이 붓고 피가 끈적하게 흐르는 느낌까지 나거든요. 먹고 나서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저는 너무 오랫동안 조금만 불편함을 느껴도 엄마 대신 설탕의 품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왜 단 것에 끌리는지도 다른 도망칠 곳도 몰랐어요.
1) 내비게이션을 확인한다
과거의 기록을 더듬어 도피처 목록 점검을 해봅니다.
나는 어디로 도망가고 얼마나 자주 도망가는가?
도망간 곳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르는지?
도피처에서 나올 때 기분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먼저 감정을 자각하는 연습을 먼저 해봅니다.
감정에 좀 익숙해졌다면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마다 어떤 충동이 드는지, 충동을 달래고 나면 감정도 달래지는지 관찰을 하는 거예요.
2) 기분 좋은 곳으로 도망간다
몇 시간이고 소셜미디어에서 스크롤을 내린다거나 멍하니 티비를 보는 것, 폭식을 하는 것 모두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도피 방법들이죠. 오히려 도망가지 않는 것만 못해요.
더 건강하고 행복한 도피처를 찾아야 합니다. 기분을 업시켜주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행동이나 순간들을 적어봅니다.
(예시)
주말 아침 한산한 카페에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커피를 마시고 좋은 책을 읽을 때
아이스크림 한 통 다 퍼먹을 때
석양이 질 때 동네를 걸으며 산책 나온 강아지들 구경할 때
좋아하는 친구를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을 때
밤새 넷플릭스를 보거나 게임을 할 때
예시에는 함정이 몇 개 있어요. 단기적인 즐거움과 안락뿐 아니라 장기적인 결과도 긍정적인 일들을 고르는 게 좋아요.
종이 쪼가리에 건강하고 행복한 도피처들을 적어놓고 예쁜 병이나 멋진 상자에 모아둡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지 않다고 느낄 때 하나씩 뽑아서 실행해보는 거예요. 어릴 때 뽑기와 다른 건 꽝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으면 미래의 내가 고마워할 거예요.
3) 도망가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과거를 극복하고 넘어가는 사람과 평생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는 사람의 차이는 그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소화했느냐에 있지 않을까요? 부정적인 경험들이 떠오를 때마다 고통을 잊으려 무감각해질 때까지 도망치는 것은 두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고 진통제만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도망칠 순 없어요. 과거의 상처가 주는 감정들은 재고품처럼 언제까지고 마음 한구석에서 먼지를 수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예측하지 못한 일들에 의해 먼지가 풀썩 일어나기라도 하면 다시 가라앉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 지긋지긋한 놈들은 소화되지 않은 채로 몇 년이고 거기 앉아있을 놈들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순간에도 늘 어딘가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게 하곤 하죠. 인생의 위기를 겪을 때 꼭 한 번씩 튀어나와서 생존신고를 하고 분위기를 망쳐주는 것도 잊지 않고요.
감정을 소화하기 위해선 도망가지 않고 감정을 그대로 느껴야 합니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불편함을 감내하고 나면 나만의 대처방법이 생길 수도 있어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안 느끼면 내가 로봇이나 소시오패스는 아닌가 의심해봐야 하니까 오히려 건강하다는 신호죠. 문제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저지르고 가는 일입니다. 그 뒷수습은 감정이 빠지고 머리가 차갑게 식은 우리들이 해야 하니까요.
저는 아직 설탕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습관적으로 단 것을 찾지는 않습니다. 더 이상 당장의 고통을 피하고자 쾌락의 늪에 빠지지 않아요. 부정적인 감정은 잊지 않고 저를 찾아오지만 전처럼 무방비하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나를 위한 탈출구를 잘 준비해놓는다면 두려움도 걱정도 좀 더 손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사진 출처: Avi Waxman, Rayson Tan, Jasmine Sessler on Unsplash, St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