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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Aug 07. 2024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는 친구를 뜻하는 인디언 말이다. 친구란 내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슬픔이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존재라는 점을 비유한 것이다. ‘비유’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적절히 비유하면 느낌이나 생각을 무척 인상 깊게 전달할 수 있다.



김연아 선수는 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렸던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 결선에 올랐다. 어느 외국인 해설자는 김연아 선수가 펼치는 경기를 보며 이렇게 해설했다.



“나비죠? 그렇군요. 마치 꽃잎에 사뿐히 내려앉는 나비의 날갯짓이 느껴지네요. 은반 위를 쓰다듬으면서 코너로 날아오릅니다. 실크가 하늘거리며 잔무늬를 경기장에 흩뿌리네요. 제가 잘못 봤나요? 저 점프! 투명한 날개로 날아오릅니다. 천사입니까? 오늘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와 이 경기장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이네요. 울어도 되나요? 정말이지 눈물이 나네요. 저는 오늘 밤을 언제나 기억할 겁니다. 이 경기장에서 연아의 아름다운 몸짓을 바라본 게 저한테는 크나큰 행운입니다. 감사합니다.”



꽃잎에 사뿐히 내려앉는 나비의 날갯짓, 실크가 하늘거리며 경기장에 흩뿌리는 잔무늬, 하늘에서 내려와 길을 잃고 서성이는 천사. 찬탄이 절로 나오는 비유적 표현이다. 경기장에서 나비와 천사의 모습, 그리고 나비의 모양이 환상처럼 떠올라 황홀함을 느낀 해설자는 눈물이 난다고 했다. 김연아 선수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몸짓을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황정민은 2013년 11월 29일에 열린 제26회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전도연과 함께 출연했던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황정민은 다음과 같이 수상 소감을 밝혔다.



“저는 사람들한테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소개해요.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 놓아요. 그러면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죄송스러워요. 그리고 항상 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를 설레게 하고, 현장에서 열심히 할 수 있게 해준 전도연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도연아, 너랑 연기하게 된 건 나에게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어. 고마워.”



이 수상 소감은 진한 감동을 자아내며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황정민은 자신을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일컬었다. ‘나부랭이’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하찮게 여겨 이르는 말이다. 황정민의 겸손한 태도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소감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영화는 제작부, 연출부, 촬영부, 조명부, 미술부, 음향부에 속하는 스태프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여 완성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여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이다. 황정민은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이 애쓰고 수고하는 것을 ‘잘 차려 놓은 밥상’에 빗대어 표현했다. 자신의 연기는 그들이 정성껏 차려 놓은 밥상에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만 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다른 사람들은 더없이 높이고 자신은 한없이 낮춘 것이다. 그렇게 멋들어진 비유로 함께 일한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든 덕분에 황정민 자신의 품격도 높아졌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경포에는 달이 다섯 개 뜬다고 한다. 하늘에 뜬 달, 경포 바다에 뜬 달, 경포 호수에 뜬 달, 술잔에 뜬 달, 임의 눈동자에 뜬 달이다. 술잔과 눈동자에 비친 달은 맨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술잔에 뜬 달과 임의 눈동자에 뜬 달은 사실적 표현보다 비유적 표현에 가깝다. 술잔에 뜬 달은 술을 마시고 흥취가 일어나서 바라볼 때 더욱 멋져 보이는 달이다. 임의 눈동자에 뜬 달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라볼 때 마음에 그윽하게 떠오르는 달이다.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 고정희, <고백>



사랑은 자기도 모르게 피어나기 때문에 찌릿하고 알싸하다. 고정희 시인은 벼락처럼 내리쳐 몸도 마음도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랑과 그리움을 감전되었다고 비유했다. 이런 고백을 들으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연인들이 서로를 끌어안을 때, 그들은 종종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온 세상이 그들의 작은 방보다도 더 작아진 것 같아, 마치 이곳만이 세상의 전부인 듯한 느낌도 받는다. 강렬한 사랑의 경험은 우리의 평범한 인식을 바꿀 수 있고, 마치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처럼 느끼게 한다.”

- 벤 마이어스, 《사도신경 - 초대교회 교리문답 가이드》에서



작은 방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연인들은 시간의 흐름이나 바깥세상의 존재를 잊는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고, 온 세상이 그들의 작은 방보다도 더 작아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순간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한순간에 존재 자체가 사로잡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우리는 죽음조차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랑과 생명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영원할 수는 없다.



미국 드라마 《굿 플레이스》에 “파도로 밀려와 포말로 부서졌으나 여전히 바다로 남아 있는 당신”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은 열기가 식어버리기도 하고 이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갑자기 설레고 두근거리며 시작되었던 사랑은 파도로 밀려왔다. 그 사랑이 변하거나 끝났을 때 포말로 부서졌다. 그래도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고, 온 세상이 작은 방보다 더 작아진 것 같게 해주었기에 당신은 여전히 바다로 남아 있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것이 짧거나 간결한 표현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얼핏 보면 풀꽃은 예쁘지 않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예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교감하는 시간이 짧으면 사랑스럽다고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오래 보아야 풀꽃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사람도 그러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내 마음과 뜻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서 나를 인정해주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너도 그렇다”에서 ‘너' 바로 ‘나’라고 생각하며 울컥하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스물네 글자 시로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울림을 전해주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851년 다시 황제가 되려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친위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추방당했다. 나라 밖으로 쫓겨나 19년 동안 벨기에와 영국령 섬에 머물렀던 위고는 1862년 망명지에서 소설을 완성해 프랑스의 출판사에 보냈다.



16년간 집필한 책이 출간된 뒤에 빅토르 위고는 출판사 사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를 썼다. 편지 안에는 ‘?’(물음표) 한 자만 적혀 있었다. 독자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였다. 편지에는 ‘!’(느낌표) 한 자만 적어 놓았다. 책이 잘 팔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 작품이 바로 《레 미제라블》이다.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은 당시 파리의 노동자들이 조금씩 모은 돈으로 책을 사서 제비뽑기로 읽는 순서를 정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옥스포드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위엄 있는 차림으로 담배를 물고 식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천천히 모자와 담배를 연단에 내려놓았다. 청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처칠의 축사를 기대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처칠은 힘있는 목소리로 첫마디를 떼었다. 그러고는 청중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청중들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처칠은 다시 한번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그것이 축사의 전부였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 축사를 직접 들은 옥스퍼드대학 학생들은 처칠이 한 말을 평생 잊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온갖 시련과 고난에 부딪혔을 때 처칠이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외치는 순간에 느꼈던 감동을 되새기며 힘을 냈을 것이다. 그의 간결한 말이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처럼 나를 격려해주는 것이다.



그대여!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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