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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10. 2023

억대연봉 찍고 14개월 후, 다시 여름이다

eposode 14. 대출은 가득히

7년 전 간염이 생겨 한 달 정도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 밖의 자유롭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었다.


퇴원만 하면 완전히 나를 위해서만 살겠다.
인생의 재미만을 추구하며 살겠다.
그리고 술은.. 조금 줄여는 보겠다.

하지만 그 후 5년 뒤 병원 입원을 권유받을 정도의 심각한 우울증 진단을 받고 밥벌이를 그만둬야 했고, 일상이 멈추며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들이 멀어졌고 나는 가난해졌다.


벼락처럼 찾아온 우울증이 여름처럼 저물어갈 때쯤 7년 전 했던 결심이 다시 일어섰다.


오직 나만을 위해, 행복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고단하기 짝이 없는 밥벌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약 먹고, 술 먹고, 일하며, 제대로 다시 한번 내리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우울증을 꾸역꾸역 찍어 누르며 겉으로 보기엔 괜찮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언제 그런 이유로 회사를 떠나왔냐는 듯, 비범한 인내를 품은 평범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버티며 살아내는 사이에 직장 생활하며 모은 전 재산이 쏟아부어진 내 소유의 집에 사시던 세입자 분들의 전세 계약 만기가 다가왔다.


내 부모님이 사시는 집보다도 넓은 평수의 그 집에 거주하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대출의 무게가 싫어 전세를 주고 원래 살던 집의 집주인에서 전세세입자로 신분은 바뀌었지만 달라짐 없는 생활을 불만 없이 하고 있었는데, 전세계약 만기가 다가오자 내 소유의 집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억대 연봉 유지하며 직장을 계속 다니던 중이었다면 주택담보대출의 월 납입액이 아주 큰 부담이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세입자 분들의 재계약 쪽으로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다.


나의 첫 집이자 30대의 많은 중요한 순간을 보내며 그곳에 든 정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일단 돈이 없었다. 그리고 15평의 작은 아파트이기에 선택의 여지없는 강제 미니멀리즘도 좋았다.


하지만 딱 그 시기, 나 홀로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하는 마케터팅 업무들이 버겁기 시작하며 욕실 환기구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담배연기처럼 다시금 우울감이 피어올랐다.  


인생이 바뀌려면 하는 일, 만나는 사람, 사는 곳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 사는 곳의 차례가 왔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작은 집을 사랑했지만, 하나뿐인 방은 휴식보다는 내면의 암흑에 침잠하는 공간이었고 거실은 생계, 생존, 생활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는데 때로 그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는 진공상태의 공간에서 굴러다니고 싶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 우울을 만끽하는 사치를 부려보고 싶었다.


부동산에 연락하여 세입자 분들께 재계약 없음을 알려달라고 했고 이사준비가 시작되었다.


가장 급한 것은 대출이었는데, 은행을 찾아 각종 서류를 제출하며 나의 재정 수준이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사를 가기 위해 마련해야 하는 최소 수준의 돈이 은행이 내게 허용해 줄 수 있는 최대 금액이었다.


연봉이 줄고 더 이상 국산 유기농 먹거리를 고집할 수 없게 되면서 긴축은 생존전략이 되었지만, 숫자로 나의 빈곤을 확인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었다.


전 재산은 휑뎅그렁 집 한채였고, 집은 내 몸 하나 뉘울 유일한 곳이었으니 사실상 재산이 아니었다.


집이 없으면 당장 중고 봉고차사서 두꺼비집 삼아 살아야 하는 처지 아닌가.


십수 년간 쉼 없이 급여를 이체받고 성실히 체크카드를 사용하며 주택청약도 가입한 알짜 고객이라며 은행은 생색도 안나는 수준의 금리 혜택을 주며 큰소리쳤고 절대 을인 나는 그저 쓰라는 곳에 쓰고, 보라는 곳을 볼 뿐 이었다.


수년 전 첫 집을 사면서 은행을 드나들 때에는 대출 창구에서도 기죽지 않았고, 은행에서는 대출 상담과 함께 투자 상품에 신용카드까지 권했었지만 이번 대출 상담에서 핵심 방문 목적 외의 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나오지 않았다.


너무 오른 대출 금리 수준에 놀라 주눅 들어하는 내게 은행직원이 소득 수준이 올라갈 가능성이 있냐는 질문을 했다.


글쎄요.. 힘들지 않을까요?


더 이상 질문은 없었고, 승인되면 연락 갈 거라는 말로 대출 신청은 끝났다. 연이어 이삿짐센터를 예약하고 인터넷 서비스의 이동을 위한 신청과 등록된 정보로 내게 우편물을 보낼 가능성이 있는 모든 금융기관 사이트에 접속해 우편물 수령처를 이사 갈 집으로 바꾸며 이사를 공식화했다.


이사 가던 날, 모든 짐을 빼낸 작은 집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곳은 나의 첫 번째 집이었고, 이곳의 집값이 오르고 연봉도 오르며 더 큰집을 살 수 있었다.


이곳은 30대의 박물관이었다.


빛나던 시기도, 지던 시기도, 가라앉던 시기도 모두 여기서 보냈다.


떠나오던 날,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1년 전 그날에는 내 안에서 내리던 폭우가 소박한 세간살이를 실은 이삿짐 트럭 위로 부서지듯 쏟아졌다.


그 모든 것을 헤치고 30대의 박물관을 닫았다.


모든 것이 멈추던 때도, 떠나는 날도 모두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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