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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08. 2023

억대 연봉 찍고 13개월 후, 유붕이 자원방래

episode 13. 나 이런 사람이야~~

우울증으로 회사를 나오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공식 근무시간을 채우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줄어든 수입을 상쇄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어린이 영어책 읽기 수업이었다.


영어가 무섭던 내가 영어 선생님이 된 것은 마치 곰이 쑥과 마늘을 먹어 완전한 인간에 이르게 되는 신화에 비견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한 편의 '인간극장'이요, '이것이 인생이다.'가 나의 영어공부記였다.


해외는커녕 바다 구경을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는 해본 적이 없는 궁핍이 지긋지긋하여 대학교 4학년이 되고 객실승무원 채용 공지가 뜨는 족족 지원했다.


지원에 필요한 토익 점수 최저 기준이 550점이었는데 죽네 사네를 연발하여 겨우 만든 점수가 560점이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20대의 나는 한 마리의 곰이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노동 아니면 굶어 죽기 딱 좋은, 신이 내 세상에 “빛이 생겨라.”라고 말씀하시기 전이었다.


항공사는 물론 대기업 공채에 모두 떨어지고 최저임금은 차치하고,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는 첫 직장을 거쳐 조금씩 자리 잡아가던 시기, 나도 한번 쨍하고 해 뜰 날 만나고 싶다는 세속적 소망으로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입학한 대학원의 졸업 영어 시험에서 전체 응시자 중 탈락한 2명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대찬 불합격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아 시작한 영어공부로 내친김에 테솔에 도전하며 ’영어로 밥 정도는 시켜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서른의 가을을 맞았다.


수능에서도 이건 그냥 제치고 가자고 포기했던 문법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고,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영어로 나오기 시작할 때쯤. '공인 영어 시험 성적은 없으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국제영어교사 양성을 위한 자격인 테솔을 취득했습니다.'로 외국어 실력 수준을 묻는 면접관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국계 회사로 이직을 했고, 하루의 대부분을 영어를 쓰며 일하게 되었다.


다정해 보이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는 동료에게 참 화목한 가족이구나라고 하지 않고, 제이크루 카탈로그에 나오는 사람들 같다는 나름의 조크를 던졌을 때 터져 나오는 상대의 웃음에 짜릿함을 느꼈다.


그 짜릿함이 좋아 3초 호기심이라 불릴 만큼 끈기 없던 내가 영어공부만큼은 놓지 않고 계속했다.


대단한 공부방법은 아니었으나, 그저 꾸준히 했다. 그렇게 영어공부하며 강산이 한번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던 시기가 찾아와 문닫힌 나의 세계에 웅크릴 때 슬며시 창문이 열리며 신이 말했다.

빛이 생겨라!

20대부터 30대 내내 이어진,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는 그저 두렵던 시간 속에 나의 신은 대체 어디 가서 무엇을 하시는가 했었는데, 30대의 막이 내려가려는 그 찰나에 나타나셨다니.


빛이 생겨 두리번거리니 알량하게 남은 몇 가지 재주 중 하나로 영어가 있었다.


회사에서 밀려나고, 사람에게 치이며 성과를 도둑맞아도 한 겹 씩 쌓아 올린 영어공부의 힘은 누구도 강탈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커리어에 에스컬레이터가 되어 주었던 영어공부는 우울증의 심해에 뭉텅 거리며 허우적댈 때 엘리베이터가 되어 지상으로 올려주었다.


기억력이 크게 감퇴하고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처음 영어공부를 하던 시기부터 항상 옆에 두고 보았던 굿모닝팝스를 집어 들고 문장을 하나씩 외우며 줄을 그었다.


그렇게 영어공부는 나를 살려주었고, 먹고살게까지 해주었다.


마케터와 영어튜터의 이중생활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이 은밀한 투잡 생활을 이어가던 중, 담당 브랜드의 해외 수출 기회가 찾아와 제품을 직접 판매하고 유통할 담당자들이 한국을 찾아왔다.


미국 유학파 대표님을 옆에서 보조하며 미팅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피부 재생 효과가 뛰어나고 좋은 전성분을 썼다고 설명하는 대표님께 바이어가 전성분 중 특히 어떤 성분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며 이 전 성분이 쓰이는 유사 제품이나 브랜드가 있다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질문해 왔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대표님의 설명이 다소 포괄적이었고, 대화가 잠시 멈추는 틈에 양해를 구하고 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운동화부터 명품, 화장품은 물론 헬스케어, 정밀기계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경계 없이 십수 년간 산전수전 겪어오며 어떤 제품을 가져다주어도 즉시 영업 미소와 함께 완판의

기적을 빚어낼 수 있는 짬밥의 힘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안 사가고는 못 배기도록, 내가 오늘 팔고 만다, 계약서 도장 찍는다는 마음으로 전 성분 속 에센셜 오일부터 각종 식물 추출물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일타강사도 울고갈 호소력 충만한, 영어로 하는 설명이었다.


속사포처럼 '내 오늘 팔고 말리라' 하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얹어 설명을 마쳤고 호기심 어린 바이어들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띵동' 하며 불이 켜졌다.


내일 바로 본국의 골드타임에 맞춰 페이스북 라이브 커머스로 첫 판매를 시작하기로 하며 첫 미팅이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첫 번째 라이브 커머스는 대박을 쳤고 그 후로 분기마다 머나먼 나라에서 매출 올려주는 멋진 친구들이 찾아와 주게 되었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오랜만에 영어를 쓰며, 나를 만났다.


나 이런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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