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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r 20. 2021

초등학교방과 후수업료가대학 강의료보다높다고요?

보연 언니는 개인전 작품 사진을 찍을 날짜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시간이 없다며 걱정을 했다.

“아들한테 도와달라고 했더니 딱 한 줄 넣더니 못하겠다고 그러는 거 있지.”

“뭘 넣는데요?”

“헝겊으로 만든 줄에 솜을 넣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요.”

이렇게 해서 엉겁결에 나는 미술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작업실은 솜과 헝겊으로 가득 차서 바닥의 조그만 틈도 보이지 않았다. 봉제공장이나 이불공장이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은 분위기. 하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게 다 뭐예요?”하면서 언니가 시키는 대로 여성의 탯줄이 될 줄에 솜을 채웠다. (해본 적은 없지만) 순대 속을 채우는 것과 비슷했다. 이런 단순 노동은 오랜만인데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재미있지?”

“화창한 주말에 여기서 솜 넣고 있으면 딱 좋겠는데요?”

“정말 그러고 싶다. 하지만 주말에는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잖아. 밥해야지, 청소해야지, 도대체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내가 놀리느라 한 말에 문득 언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니가 대표로 있는 미술단체(채움)는 청소년, 장애인, 노인과 하는 다양한 행사를 한다. 언니는 행사 기획은 물론 대학교 시간강사, 방과 후 수업까지 하고 있다.

“작년에 수업한 초등학교에 내가 계속한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놀라더라고.”

채움에 있는 선생님 하던 수업이었는데 그분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언니가 대타로 하게 된 수업이었다. 지난번에는 교사를 구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언니가 했지만 담당자는 언니가 올해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0년 넘게 활동한 작가가 설마 이런 일까지 할까 싶었던 거다.     


“그래도 고정수입이 들어오는 곳이잖아.”

언니는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 강의료(32,000)가 전문대학교의 시간당 강의료(30,000원) 보다 높다고 했다. 그 대학교의 시급은 얼마 전까지 25,000원이었는데 그나마 오른 거라고 했다.


“나 좀 안됐지?”

언니의 물음에 나는 무슨 예술가가 돈 얘기만 하냐고 했지만, 내가 학원 할 때 이 말을 들었더라면 언니를 짠하게 바라봤겠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저런 달관을 배울까’를 속으로 생각했다.   

  

지위나 경력이 아니라 작품으로 말하는 게 작가고,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나쁜 짓 말고는 뭐든 할 수 있는 거였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보연 언니가 나한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너무 애쓰다 보면 지치잖아. 오래가려면 쉬엄쉬엄 해야 돼.”

글 쓰는 일은 시간을 이겨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다. 초기에 번뜩이는 재능보다 지난한 시간을 통과한 뒤에 나오는 자기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한 건. 은근하게 풍겨 나오는 그 사람만의 독특함이 일이 되고, 삶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 나가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언제부턴가 보연 언니와 일주일에 몇 번씩 반찬거리나 간식을 주고받고 있다. 우리 사이에 비둘기처럼 쇼핑백을 전달해주는 건 다름 아닌 보연 언니의 아들인 인준이다.      


지난주에는 양배추, 감자, 계란을 넣어서 샌드위치 속을 만들었는데 양이 많길래 인준이 편에 보냈더니 다음날 인준이가 수업하러 올 때 언니가 준 시금치를 들고 왔다. 시금치는 흙 한 톨, 잔뿌리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거 작업실 선생님이 농사지은 건데 많아서 나랑 나눴어.”  

작업하랴 수업하랴, 정신없는 중에도 애들 밥걱정하는 언니 사정을 아는 동료의 마음이 느껴졌다. 덕분에 나까지 편하게 시금치를 먹게 되었다.     


언니와 반찬 딜리버리를 시작하면서 서로의 가족, 지인들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 준 당근 잼 있잖아. 이 음식 공방 사장님이 준거야.” 언니 주위에는 조미료를 쓰지 않는 음식을 만드는 분, 생계의 불안 속에서도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언니와 어딘가 닮은 사람들이었다. 부족하지만 풍요롭고 힘들지만 행복한 사람들. 그분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나도 힘을 내야지, 의욕이 불끈 생기고는 했다. 그리고 언젠가 언니를 통해 그분들에게 내 이야기가 전해진다면 나도 조금쯤 용기를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현대미술 개인전을 한 고나영 작가가 내 책의 디자인을 해주겠다고 했다고 언니가 전해줬다. 고나영 작가는 언니와 십 년 넘게 채움을 이끌어가고 있는 분인데, 아마 그분도 내가 어느 날 뜬금없이 학원을 폐업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을 언니한테 들어왔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한테 응원을 해주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만 눈물이 날 뻔했다.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뭐가 이렇게 뭉클하고 벅찬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글쓰기를 시작한 게 잘한 일 같다. 글을 쓴 뒤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몸보다 마음이 가까워야 가능한 일이었다. 내 안에 있는 가족, 친구, 내가 사랑했던 모두와 화해를 한 기분이다. 부족하지만 풍요롭고 힘들지만 행복한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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