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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ug 17. 2021

돈이 없어서 좋은 것

요즘 나는 ‘돈이 없어서 좋은 것’을 메모장에 쓰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너 이거 필요하지?’라는 광고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라도 뭔가는 해야 했다.

  

“미역국에 들어가는 소고기가 크게 보인다, 맥도널드의 1,500원짜리 커피가 커다란 사치로 느껴졌다.”     

이런 식이다.     


학원인 시절 나는 출근 전에 스타벅스에 들릴 때가 많았다. 라떼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 케이크를 주문해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는데, 일어설 때 만족스러웠는지는 모르겠다. 곧장 학원에 가기는 억울하고 뭔가 나한테 보상을 주고 싶었던 기분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최근에 거의 매일 월명산을 1시간 30분 정도 산책을 하는데 아침 공기에서 가을이 느껴졌다. 서늘한 바람에 늘어져있던 몸의 세포가 일으켜지면서 단번에 ‘기분 좋은 상태’가 되어버린다.    

아침 햇살이 비친 월명산 산책길

  

문득 조건이 필요한 행복보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순간이 되면 바로 알 수 있는 감정이다. 가을이 오고 있구나, 하는 순간 노랗게 변한 낙엽이 보이고 얼마 안가 따사로운 가을볕을 쪼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부자가 된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우수에 찬 보미

   

내가 가진 건 일일이 셀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부지런해야만 가질 수 있기도 하다. 이미 옷이 많으면서도 신상 옷을 검색하거나 끝도 없는 유명인의 추문 기사를 파다 보면 시간이 없다. 매일 나에게 비처럼 쏟아지는 자연의 아름다움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다.     


몸은 정직하다. 온몸의 감각을 통해서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걸 좋아하지, 가방 하나, 구두 하나에 만족하지 못한다. 걸으면서 지난 어느 해 가을을 떠올리자 마치 그 추억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나는 시공간을 벗어나고 다시 한번 그와 같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미 충분히 행복한 상태에서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있는 맥도널드에 들렸다. 드라이브 스루로 집에서 챙겨 온 텀블러에 1,500원짜리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얼마나 사치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이게 뭐라고, 커피 한번 쳐다보고 아리송한 기분에 빠졌다.    

 

그래서 생각한 게 행복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라는 감정이라는 결론이었다. 대학에 합격하면, 취업을 하면, 성적이 오르면, 하는 조건이 필요한 건 행복이 아니다. 조건이 성립되는 순간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     




이만하면 충분하다, 는 건 안일한 태도를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정도도 괜찮지만 한번 해볼까, 하고 도전하는 사람은 느긋하면서 진지하게 일을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일을 오래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것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몰두하는 건 단기간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스스로를 소모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하는 말로 번아웃이 되어서 어느 순간 모든 게 무의미해져 버릴 수 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있으면 돈이나 명예에 끌려 다니지 않고 나의 소신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유리해 보이는 길로 달렸지만 막다른 벽에 마주친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나를 혹사시키고 삶에서 나를 소외시키지 않으려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기분이 드는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한다. 미각, 청각, 시각, 촉각, 후각 하나만 즐길 수 있는 방법보다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면 좋겠다. 그게 나한테는 등산이지만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거다.     


월명산 산책 코스의 중간쯤에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트럭이 나온다. 나는 거기서 장을 보는 걸 좋아하지만 많이 사면 걸어올 때 힘들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오늘도 실패. 아오리, 파프리카, 밤고구마, 세 가지나 사고 말았다. 13,000원어치가 왜 이렇게 무겁냐며 두 번을 벤치에 앉아서 쉬어야 했다.  

 

색깔도 예쁜 아오리, 밤고구마, 파프리카

   

목도 마른데 사과 맛이나 보자, 하고 제일 새파란 놈으로 하나 골라서 바지에 쓱쓱 문질러 한입 베어 물었다. 그랬더니 보미도 자기도 달라고 야단이어서 내가 여태 힘들게 들고 온 건데 넌 일도 안 했잖아, 하고 애를 좀 태우다가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예쁘니까 줄게

동네 마트에 가니 먹갈치를 6,500에 판매하고 있었다. 살이 많지는 않았지만 딱 봐도 싱싱해서 갈치조림을 하면 맛있을 것 같았다. 집에 가자마자 냄비에 물을 올리고 갖은양념과 갈치를 넣고 끓는 동안 후딱 샤워를 했다. 개운한 몸으로 이제 막 완성된 갈치조림을 먹는데 행복한 기분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세상은 평평한 대지고 내가 걷는 곳이 곧 길이 된다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하나의 좁은 길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많은 가능성에 도전하며 살고 싶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나를 막다른 길에 몰아세우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갈치에게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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