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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Nov 08. 2021

똑같은 옷을 왜 산거야?

청암산에 갔다가 근처에 있는 옥산 로컬푸드 매장에 들렀다. 오늘도 로컬푸드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늙은 호박, 시래기를 보자 시래기밥에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은 된장국 생각에 신이 났다. 가을은 산에만 온 게 아니고 여기도 왔구나. 눈으로 가을을 만끽했으니 이번에는 입을 즐겁게 해 줄 차례. 단감, 늙은 호박, 시래기, 파 등등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길문고에 들러 <엄마의 원피스> 10권을 입고했다. 3일 전에 4권 입고했는데 그새 한 권 밖에 남아있지 않은 걸 보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콩닥콩닥 신혼살림이라도 하는 기분.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고민은 왜 한 건지. 지금 내 모습은 결혼 안 한다고 노래를 하던 여자가 결혼한 뒤로 남편밖에 모르는 모습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냄비에 물부터 올리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초밥이한테 물었다.

“뭐 먹을래? 된장국 끓일 건데.”

“나 안 먹어. 아니 못 먹어. 원피스 입으려고 어제부터 굶었잖아. 엄마 나 어때? 이거 나한테 완전 어울리지?”

초밥이는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예쁜 척해서 짜증 난다고 돌 던질 각인데?”     

늙은 호박과 시래기에 들뜬 나, 원피스 핏 때문에 밥을 굶는 초밥.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원피스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학생 일인당 4만 원 상당의 책을 사주는 책꾸미러미사업으로 담임 선생님이 사고 싶은 책 이름을 적어내라고 했단다. 초밥이는 ‘엄마 책’을 쓰려고 했지만 제목이 생각이 안 나서 못 썼다는 말을 옆집 강아지 이름이 생각 안 났다는 말처럼 했다. 웃기지도 않는데 막 웃으면서. ‘엄마’가 네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보고 있으니 슬프지도 않는데 막 슬퍼지는구나.     


며칠 전에 초밥이는 간부수련회를 하고 밤 9시에 집에 돌아왔다.


“엄마, 엄마, 엄마, 강당에서 손잡고 뭐 하는 게 있었는데 대박(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내 옆에 잘 생기기로 유명한 오빠가 있는 거야, 완전 떨려가지고 손을 꽉 잡지도 못하고 살짝 잡았어. 그런데 바로 앞줄에 그 오빠 여자 친구(전교회장)가 있는 거야. 완전 눈치 보여가지고 어쩌지 하고 있는데 뿔테 안경에 옷간지 장난 아닌 오빠가 눈치 까고 ‘내가 바꿔줄게’하면서 내 옆에 온 거 있지, 우와(제자리 뛰기), 사실 이 오빠가 더 내 스타일이었거든. 그 뒤부터는 완전 내 정신 아니었잖아.”


“지금도 정신 안 돌아온 것 같은데?”    

 

마치 일인극을 보는 것 같다. 나를 보면서 얘기를 하지만 나한테 하는 얘기가 아닌 것 같은 게 꼭 그랬다.     

이틀 후 “엄마, 엄마, 엄마, 나 할 얘기 있어, 간부수련회 때”라고 시작하는 녀석에게, 

    

“잘생기기로 유명한 오빠하고 손잡았는데 앞에 여자 친구인 전교회장 언니가 있었어. 이걸 눈치챈 친구 뿔테 안경이 자리 바꿔줘서 너랑 손잡았는데 너는 뿔테 안경이 네 스타일이었던 거야. 맞지?”

아, 얘기했구나, 하더니 녀석은 별 동요 없이 하던 일로 돌아갔다.    

 

후드티를 사고 싶어서 초밥이와 쇼핑몰을 일 년 반만인가 이년만에 갔다.      

“엄마가 후드티를 샀다고 해봐. 예뻐 보인다던지 그런 거 없잖아, 그냥 아줌마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     

나이키 매장에 마네킹에 디스플레이 한 옷을 보고 내가 괜찮냐고 하자 초밥이가 별로라며 자기가 고른 회색 기본 후드티를 입어보라고 했다.     


“둘 다 입어볼게.”

하나씩 입어본 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치의 차이도 없어서였다. 다른 옷을 입었는데 어떻게 똑같아 보일 수 있는 건지. 이 기이한 현실 앞에서 나는 아득해지고 말았다.     


“네가 고른 걸로 할게. 근데 라지네, 미디엄으로 해야겠다.”

“아니지. 엄마. 후드는 박시하게 입어야지.”

“그래 그럼. 라지로.... 그런데 지금 누구 옷 사는 거야?”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같이 입는 거지.”

그래, 그러면 되지 했다. 뭘 입어도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와서 빨래를 개는데 나이키 회색 후드티가 있었다.     

“뭐야? 똑같은 걸 왜 산거야.”

“달라. 오늘 산 건 이번 시즌 거라고.”

그렇단다.     


예전에 나는 정장을 사러 가면 주말에도 정장을 입었고, 운동복이나 청바지를 살 때는 같은 종류의 옷을 입고 갔다. 그래야 어울리는지 정확히 볼 수 있어서였다. 쇼핑할 때 내 안의 집중력과 진지함을 총동원했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짜릿해했던 사람이었다. 이걸 떠올리는데 마치 전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같이 침대에 누워있을 때 초밥이가 자기 단점을 말해달라고 했다.     


“요즘 널 보면 외모 가꾸는 게 극에 달한 것 같아. 온통 신경은 누가 날보고 예쁘다고 하는지에 가있는 데다 남도 외모로만 평가하잖아?”     


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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