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Sep 07. 2022

어른의 맛

단단한 행복이 있는 섬 ‘돈없이도’10

어떤 요리는 나를 진짜 어른처럼 느끼게 한다. 어른을 넘어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의식은  나이를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꽈리고추 찜을 만들었다. 윤이련 요리 선생님 말대로 진간장 말고 액젓으로 양념장을 만들고, 부침가루(밀가루가 없어서)를 넉넉히 뿌리고 5분 이상 쪄낸 것이 맛에 포인트였다. 언젠가 풋내가 났던 이유는 밀가루와 찌는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맛 보는 순간, 식구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누구 하나 맛있다는 말 없이 묵묵히 먹기만 하던 경상도의 밥상 풍경이 떠올랐다. 스테인리스 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던 그 여름날이 몹시 그리웠다. 15년생 딸은 손도 안대길래 나는 ‘꽈리고추 찜’이라는 이름만 알려줬다. 나도 그 나이에는 거의 먹지 않았고 맛있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어째서 이다지도 맛있단 말인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 맛을 알게 되는 음식도 있다. 이름하여 ‘어른의 맛’     

어른의 맛, 꽈리고추 찜

고추와 밀가루를 함께 쪄낸, 나물도 부침개도 아닌 이 특이한 반찬을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고추의 칼칼함을 밀가루가 부드럽게 감싸주는 이 요리에는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입맛을 돌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장마철에는 열무도 다 씻겨 내리가 삐거든. 그래가 고구마 줄기로 김치를 담가먹었는가 봐.” 

    

윤이련 요리 선생님의 말씀. 택배로 반찬을 주문할 수도, 빵이나 김밥을 살 수도 없던 시절, 내 손이 아니면 많은 식구들의 입에 들어갈 게 없으니 눈에 불을 켜고 논밭을 둘러보다가 고구마순을 발견했나 보다. 그냥 먹으면 아무 맛도 안 나지만, 김치로 담고 보니 맛이 있어 여름 별미로 자리 잡게 되지 않았을까. 

    

음식은 먹는 사람뿐 아니라 만드는 사람에게도 기운을 준다. 꽈리고추 꼭지를 하나하나 떼고 부침가루를 묻혀 찌고, 양념장을 만들어 섞으면서 처음에 성가셨던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졌다. 예전 어른들도 고구마순을 끊어와 다듬고 김치를 담으면서 잔잔하게 힘이 차오르지 않았을까. 

    

고구마순의 조직은 양념을 흡수하지 못해서 김치를 담을 때 절이지 않는다. 그래서 짜지 않아 덮석덮석 집어먹을 수 있다. 화룡정점은 비빔밥이다. 고구마순 김치를 밥보다 더 많이 담고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비비면 이 맛이 또 예술이다. 빈곤 속에 풍성함이 탄생한다. 고구마순 김치, 꽈리고추 찜도 그렇다.

    

명란 파스타는 내가 아침 메뉴로 자주 하는 요리다. 명란만 있으면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들어도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인다. 나는 면보다 다른 재료를 많이 넣는 걸 좋아하는데 냉장고에 닭가슴살, 오징어, 브로콜리, 양파, 버섯이 있어서 프라이팬이 가득 차도록 넣고 볶았다.  

   

"잘 먹었쑤다"


탄산수에 레몬청을 넣은 레모네이드와 곁들여 차렸더니 초밥이가 잘 먹었다. 

"잘 먹었쑤다. 오징어가 맛있네."

내 접시에 있는 오징어를 초밥이 접시에 넣어줬다. 싱싱하고 부들부들한 오징어는 두 달 전 트럭에 산 거다.     

생일,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걸 잊지 말라는 경고라도 하듯 아팠다. 목이 아픈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병원에서 코로나 신속항원검사를 받았지만 음성이었다. 몸살감기약을 처방받아 나오는데 ‘동해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오징어가 여섯 마리에 만원’이라는 트럭을 만났다.  

    

“만원치 주세요.”

“이럴 때 이만 원 치 사서 냉동실에 넣어놓고 드세요.”

“그래요. 이만 원 치 주세요.”      


집에 돌아와 오징어를 손질해 두 마리씩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은 다음 그 자리에서 두 마리를 데쳐서 먹었다. 동해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오징어가 맞네. 사장님 말을 듣기를 잘했어.   

   

감기약을 삼일째를 먹어도 차도가 없어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받았다. 다음날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처음과 다른 병원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다시 받았지만 결과는 또 음성. 

    

“감기라면 왜 이렇게 안 낫는 거죠?”

답답한 마음에 의사에게 물었다.

“약이 안들을 때도 있어요.”     


감기 기운이 있어도 약 안 먹고도 다음날이면 말짱했는데 이번에는 약을 삼일 동안 먹어도 낫지 않다니. 코로나가 아니면 대체 뭐지. 결국 나이 때문인가.     


4일째 아침, 코로나를 확신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고 목이 완전히 잠겼다. 침대에 누운 채로 초밥이한테 전화했다.


“엄마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 요거트 먹고 가.”     

잠시 후 초밥이가 문을 열더니 “따뜻한 물 갖다 줄까?”물었다.

“엄마 산에 갈 때 쓰는 물병에 물 가득 채워서 갖다 줄래?”

초밥이는 물을 갖다 주고 설거지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프니까 설거지를 하는구나.   

  

아픈데 또 잠은 깨버려서 거실로 나왔다.

“아무래도 걸린 것 같지?”

“어.”

어제보다 기침을 심하게 했고 초밥이가 불안하게 쳐다보길래 마스크를 썼다. 그때 문자가 왔다.   

  

“김준정님 코로나19 

PCR 검사 결과 

‘음성’입니다.     


“나 진짜 아프다고!”     


생일에 특별한 이벤트 없이 ‘인정받지 못한 코로나’에 걸리고, 연 언니가 밥 먹자고 한 것도, 독서모임도 전염 위험 때문에 불참했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냉동실에는 오징어 열 마리가 있고 평범하게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른이니까.          

이전 12화 가성비 0을 추구하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