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투리 중에 “꺽정시럽다”라는 말이 있다. 귀찮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걱정된다를 합친 참으로 가성비 높은 말로 다른 대체할 만한 말이 없을 정도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산을 갈라치면, 이 말부터 떠오른다. 꺽정시럽게 도시락은 뭘 챙기며 꺽정시럽게 산은 또 어떻게 오른단 말인가.
푹푹 찌는 듯한 날씨에 진안 선각산 환종주를 했다. 덕태산장으로 올라서 덕태산-삿갓봉-선각산-투구봉-점전폭포로 내려갔다. 선각산 데크에 올라 조망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던 찰라 희남 삼촌이 “어디서 왔어요?” 하고 물었고, “익산에서 왔어요”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희남 삼촌이 사람들 얼굴을 다시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이게 누구여! 너 ㅇㅇ아니여?”
“희남아!”
그 분들은 희남 삼촌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00와 연락되냐, 라는 말들이 주고받다가 그러지말고 막걸리라도 한 잔 하자며 아예 자리를 잡았다.
“희남이 시장되었으면 이렇게라도 못 볼 뻔했어.”
동창 중 한 분이 말했다. 삼촌은 대학을 다닐 때는 학생운동을 했고 40대에는 민주노동당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때 군산시장 선거에 나갔다는데 그건 나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대학 졸업장 하나면 어디든 취직이 되던 시절, 삼촌은 건설 노동을 시작했다. 친구 중 누구는 대기업 임원이 되고, 누구는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삼촌은 새벽 3시면 일어나서 아침을 차려서 먹고 5시에 건설 현장에 출근하는 일을 삼십 년을 해왔다. 60세인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일주일 중 하루 쉬는 일요일에 등산을 한다.
삼촌은 20년동안 혼자 산을 다니면서 전라도와 충청도권 산의 환종주 코스(네발로 가는 코스)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게 되었다. 길이 없어져서 알바하기 딱 좋은, 한번 갔다 하면 치를 떨고 다시 가지 않는 코스만 수집한 것이다. 요즘은 그걸 우리 사서고생팀한테 공유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한편 나는 빡센 코스만 골라서 가자고 하는 삼촌을 보면 이해가 안되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여섯 개 봉을 오르내렸고 내려가는 길이 급경사에 정비가 되지 않아서 네 발로 내려갔다. 삼촌 뒤를 따라가며 “이런 길을 가고 싶을까”하는 원망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삼촌은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 수감이 되었다. 삼촌은 그때 일을 자세히 말한 적은 없다. 딱 한 번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0.75평 독방에 수감된 적이 있었어. 거기서 할 게 없는 거여. 그런디 지인이 요가책을 하나 보내줘서 그걸로 요가를 마스터해부렀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힘드셨겠어요”라고 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 희남 삼촌한테 나는 얼마전에 서명숙 작가가 학생운동을 하다가 236일간 교도소에 수감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 <영초언니>를 선물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희남 삼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혹시나 잊고 싶었던 성처를 건드리게 하는 게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삼촌이 읽으면 어쩌면 힘들지도 모르겠어요.”
몇일 후 삼촌이 문자로 감상을 보내왔다.
“서문과 본문을 조금 넘어섰을 뿐인데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쩌면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 이런 책을 소개한 친구가 산행 동료라서 너무 고맙다.”
나한테도 참 고마운 말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97학번인 나와 너무나 다른 시간을 보낸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다. 하지만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젊음 하나만으로 빛나야 했던 시간을 누리지 못한 분들이 안타깝고 그 시간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를 포함한 후배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 삼촌한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지나온 아픔을 가까이에 있는 삼촌을 통해 내가 잊지 않을 수 있어서 그것 또한 다행이었다.
건설 현장은 요즘 그야말로 살인적인 더위다. 새벽부터 더운 기운이 느껴지는 날, 나는 삼촌한테 문자를 보냈다.
“더위 조심하세요. 저도 오늘 하루 치열하게 보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