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우리는 곧장 마트로 향했다. 첫 번째로 간 마트는 냉장고가 고장인지 맥주가 미지근했다.
“이래서는 못 마셔.”
유선수가 말했고, 나머지 세 명도 “그럼, 못 마시지”하고 우르르 빠져나와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몰려갔다.
냉장고 안에 가지런하게 줄을 서 있는 맥주가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에델바이스, 유선수와 삼촌은 카스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네 캔에 만 원인 세계맥주를 사는 게 더 싸다며 카스를 스텔라와 버드와이저로 바꿔왔다. 내가 맥주를 들고 갔을 때 뺏기는 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뜬 두 사람은 세 캔이 네 캔으로 늘어난 걸 보고 안심했다.
오늘 코스는 덕유산 칠봉-설천봉-향적봉-중봉으로 19.6킬로미터였다. 중봉에서 오수자굴까지의 길은 굴에 갇힌 게 아닌지 의심될 싶을 정도로 지루했다. 누군가가 하산주 얘기를 꺼낸 건 그때였다. 아직 도착하려면 7, 8킬로미터가 남았지만 다른 얘기를 하다가도 도돌이표처럼 하산주로 돌아왔다.
“안주는 뭐로 하지?”
“웨하스요.”
희남 산촌의 물음에 나는 웨하스를 외쳤다. 웨하스가 맥주 안주로 좋다며 희남 삼촌이 사 왔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추억의 과자냐며, 과자 업데이트가 안 됐나 봐요,라고 했다. 그랬는데 막상 먹어보니 웨하스가 맥주랑 찰떡궁합이 아닌가. 그 후로 나한테 웨하스는 어린 시절 선물 세트 상자에서 자리만 차지했던 과자에서 신박한 맥주 안주로 업데이트되었다.
“맨날 웨하스만 먹냐? 오늘은 땅콩 오징어 어때?”
유선수의 말에 내가 “오징어 땅콩이겠죠”라고 정정해 주자 유선수는 “알아들으면 된 거여”라고 했다.
그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오수자굴에 도착했다. 굴에서 시원한 기운이 뿜어 나와서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맥주를 얼려왔으면 지금 먹으면 딱인데 아쉽네. 근데 캔 맥주 얼리면 터지지 않나?”
지리산 아빠의 질문에 유선수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카스는 안 터지고 하이트는 터져요.”
그러자 희남 삼촌이 버럭 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맥주캔을 개발한 사람에게 로열티를 주고 맥주회사가 공통으로 쓰는 건디.”
“실험해 보면 카스는 진짜 안 터진다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허지도 말어.”
그러고도 유선수와 희남 삼촌은 맥주캔 공방을 계속했다. 나는 이 흥미진진하지 않고 의미 없는 실랑이를 보니 영화 <친구>에서 조오련과 바다거북이하고 수영하면 누가 이길 것 같냐고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오수자굴을 지나서도 길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중봉에서 오수자굴, 오수자굴에서 백련사, 백련사에서 무주구천동, 세 개의 길이 누가 누가 더 따분한지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것 같았다. 그때쯤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백련사만 지나면 나오는 어묵 파는 식당, 거기만 가면 목을 축일 수 있어, 조금만 힘을 내자. 사막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해가는 기분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그 집에서 살 생각 말어. 지난번에 막걸리가 오천 원이었잖여.”
삼촌은 귀신이 분명하다. 어떻게 내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건지. 삼촌의 말에 다리 힘이 탁 풀렸지만, 빨리 걷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게 편의점이라는 오아시스에 다다른 것이었다.
편의점 냉장고 성능은 우수했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순간,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한 치의 의심 없는 기분 좋은 만족감이 맥주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9시간 동안 메고 있었던 배낭을 내려놓는 것만으로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고,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는 심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