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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어린 Apr 29. 2023

굳건한 믿음으로, 복희에게

지리산에서 보내는 펜팔(12) -  산달의 춘분편지

복희, 봄볕 듬뿍 가득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나요? 저는 오늘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연희동의 궁동산을 올랐어요. 이 좋은 날에 앉아만 있자니 몸이 찌뿌둥해서 안 나고는 못 배기겠더라구요. 그래서 무턱대고 길을 헤매다보니 샛노란 개나리님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나리님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서울의 도시 한복판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봄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일부러 꽃을 찾아가지 않았는데도 제게 선뜻 찾아와주었어요. 참 감사했어요.


봄기운에 떠오른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옛적에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가 있었대요. 그 나무는 자신에게 꽃을 주지 않은 땅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어요. 꽃을 가지지 못한 나무의 슬픔이 온 산에 퍼져 땅에서는 더 이상 어떤 식물도 꽃을 피울 수가 없었대요. 그러니 봄도 오지 않았구요. 오직,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 작은 옹달샘 속 연꽃만이 피어났어요. 아무도 없는 산에서 홀로 피어난 연꽃은 나무에게 말했어요. “내가 당신의 꽃이 될 테니, 더 이상 땅을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산에 봄을 돌려주세요.” 말을 마치고 연꽃은 자신의 꽃봉오리를 나무에게 모두 주었어요. 자신을 희생해 꽃을 내어준 연꽃에게 부끄러움을 느낀 나무는 슬픔을 거두고 연꽃에게 받은 꽃봉오리를 잔뜩 피워내 산에 봄을 돌려주었답니다.


눈치 채셨나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무 위에 피어난 연꽃, 목련이에요. 목련은 그래서 봄이 오기도 전에 자신이 꽃을 피움으로써 봄을 불러내요. 꽃을 재우고 나서는 다시 연꽃에게 꽃봉오리를 돌려주었는데, 그래서 연꽃은 봄이 다 가고 난 여름에 그제서야 자신의 꽃을 피운답니다. 방금 막 지어내 봤는데 좀 허접하죠? 목련을 가장 좋아한다는 복희에게 이야기를 선물하고 싶었어요. 지난 편지에서 복희의 웃음 선물을 정말 기쁘게 받았거든요. 보답하고 싶었어요. 아직 얼어붙은 산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 봄을 알려준 목련처럼 복희의 이야기들이 저를 그렇게 깨워내요. 목련을 닮았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니랍니다.


복희는 목련 향을 맡아본 적 있나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목련이 한 그루 있었어요. ‘한빛’이라는 이름의 학교였는데요. 2층에 있는 교실에서 내려다보면 만개한 목련의 정수리가 보이기도 하구요. 밤에는 환한 전등이 까만 밤의 학교 가운데에서 목련을 비추는데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요. 우리는 풀벌레 소리 들리는 봄밤에 하아얀 목련 꽃 아래 벤치에 앉아 새 학기 새 친구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어요. 영어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목련 꽃을 따오라고 해서, 꽃잎 하나하나를 뜯어가면서 문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 새로이 한빛에 온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기 위해 그런 방법을 생각해내셨겠구나 싶어요. 참 특이하죠?


그래서 그런지 제게 한빛의 봄은 목련 향으로 남아있어요. 목련 향이 나기 시작하면, “아, 이제 또 새로이 시작이구나”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그때의 모든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아요. 다만, 그곳에서 처음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이렇게 설렘 가득한 공간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껴보았을 뿐이에요. 아, 제 표현력을 탓해야겠어요. 말로 잘 설명하지 못하겠네요. 그럼에도 꽃이 피고 걸친 옷에서 사락사락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저는 가끔 그 향기를 맡아요. 그리고는 그때 그 마음으로 오늘이 살아져요.


그래서 그런지 제게 한빛의 봄은 목련 향으로 남아있어요. 목련 향이 나기 시작하면, “아, 이제 또 새로이 시작이구나”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그때의 모든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아요. 다만, 그곳에서 처음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이렇게 설렘 가득한 공간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껴보았을 뿐이에요. 아, 제 표현력을 탓해야겠어요. 말로 잘 설명하지 못하겠네요. 그럼에도 꽃이 피고 걸친 옷에서 사락사락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저는 가끔 그 향기를 맡아요. 그리고는 그때 그 마음으로 오늘이 살아져요.


사실 한빛을 나와서는 그 감각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되고, 세상을 다른 렌즈를 통해 바라보다보니 한빛이라는 공간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많은 친구들이 한빛을 ‘애증의 공간’이라고 부르고는 했어요. 저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곳에서 나와버린 저로써는 그곳이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라 답답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세상의 아주 일부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게 참 아쉽고, 원망스러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그 곳을 미워하는 것이 저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곳에서 다투고 서러워하고 웃고 설레면서 자랐거든요. 우리는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고,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제 삶 속에 많이 녹아들어 있어요. 그 안에서 우린 충분히 멋지고 또 아름답게 최선을 다했어요. 이따금씩 저의 공동창조자들을 생각해봐요. 가족들,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 그리고 동물들과 식물들, 흙, 물, 공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나의 동지들. 그것들이 때때로 저를 아프게 했을지라도 저는 그들 틈에서 부대끼며 숨을 들이쉬었던 거죠. 제가 내쉰 숨은 또 누군가에게 들이마실 숨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요? 저는 이 모든 들숨과 날숨들이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정성을 담아보는 것이요.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스스로를 누구보다 다정하게 사랑해버리는 것을요. 복희,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면서 나를 미워하는 일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그렇다고 세상 밖으로 우리가 나갈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나를 만들어온 세상을 이해하고 감싸안는 일이에요. 그럼으로써 우리가 변화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어떤 숨은 서로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숨은 서로를 붙잡아주기도 해요. 서로가 서로를 구해내기도 해요.


얼마 전에 지리산에 들렀어요. 이 산 어딘가에 복희가 살고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밤새 내린 봄비 뒤 찾아온 냉이님과 쑥님을 찾아냈어요. 비릿한 흙 냄새와 냉이 향이 얼마나 향기로웠는지! 봄은 참으로 향기의 계절이에요. 허겁지겁 손에 흙이 잔뜩 묻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잔뜩 소쿠리에 담았답니다. 그걸로 냉이밥과 쑥전을 만들어 먹었어요. 그곳에서 저는 땅을 밟고 나무가 자라나고 꽃이 터지는 소리를 듣었어요. 복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산에 산다는 것은 쉴 새 없이 흙을 뚫고 올라오는 풀들을 매일매일 반갑게 맞이하는 일이더군요.


저는 그래서 실컷 웃을 수 있었어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저를 미워할 겨를이 없더라구요. 복희,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길어지는 절기래요. 춘분이 지나고나서부터는 낮이 밤보다 길어져요. 해님이 점점 더 친절해지니 우리는 더욱 부지런해져야겠어요. 해님이 보여주는 그들을 빈틈없이 담아보려면요! 늘 자신의 일을 부지런히 해내는 이들을 만나야겠어요. 그러면서 저 자신도 사랑해볼래요. 복희는 잘 웃고 있나요? 씨감자가 앞으로 복희를 얼마나 웃게 할 지 기대돼요. 유머와 애정어린 이야기 듬뿍 전해줘서 고마워요. 제 서툰 이야기가 복희를 웃게 할 수 있기를 늘 바라요.


어떤 슬픈 일이 있어도,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게 곧 우리 웃음의 거름이 될 거라고 믿어요. 그런 믿음이 있다면 삶을 힘차게 뛰어다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복희는 제게 그 믿음에 설득력을 부여해줘요. 함께 지금 이 순간의 봄볕을 잘 기억해보자구요. 또 다른 봄을 불러올 꽃을 피워내기 위해서요.


봄볕에 취한 산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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