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문화센터에서 pop를 배워온 친구가 저에게 아기자기한 글씨를 써서 선물로 주었죠.
"우와~ 이런 건 꼭 배워야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배우면 아무래도 훨씬 잘 쓰기는 하겠지. 그런데 독학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친구가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넘사벽'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선물 받고 나니 카페나 문구사에 지날 때 보이는 pop는 언제가 한 번쯤 배워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빠서 당장 배울 수 없으니 기억 저편으로 꾹 눌러두었죠.
시간이 꽤 많이 흘러갔어요.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면서 저만의 시간이 생겼죠. '이제 하나씩 뭐든 배워보자' 저만치 미뤄 두었던 pop를 떠올렸지만 가르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대신 캘리그래피라는 새로운 글씨가 눈에 띄었어요. 캘리그래피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pop보다 훨씬 고급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손바닥만 한 종이에 물결이 일렁이는 글씨를 보면서 저는 첫눈에 반해버렸습니다.
배울 수 있는 곳이 인근에 없어서 포기할까 싶었을 때 온라인에서 캘리그래피 모임을 찾았어요. '매일 15분 연습하면 독학 가능하다니... 세상에나~' 도구가 많이 필요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따라 할 수 있는 교본 그리고 캘리 팬 하나가 기본이더군요. 취미로는 딱이다 싶었어요.
모임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배운 것은 선을 연습하는 것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글씨를 쓴다"라고 생각했지요. 하루하루 연습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쓰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그린다"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요. 선만 연습했던 시간이 어느덧 단어가 되고 글귀가 되고 시가 되어 종이를 수놓았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다 같은 교본을 보고 연습을 했는데도 캘리에서 개성이 드러났어요. 부드럽게 흘러가는 캘리가 있는 반면에 강렬하고 힘 있는 글자들을 보고 있으면 유명 화가들을 떠올렸답니다. 집, 거리, 풍경, 같은 사물을 보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화폭에 담은 것처럼 캘리그래피가 딱 그랬어요.
15분의 시간은 어느덧 1시간이 훌쩍 넘기기도 할 만큼 펜으로 글씨는 그리는 일은 시간을 잊게 만들어요. 마치 명상에 빠지듯이 펜을 쥐고 그리고 싶은 글귀들을 그려가요. 집에 있을 때건, 회사에서 잠시 쉴 때건,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서 건 종이와 캘리 팬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나는 필체가 엉망이야. 어떻게 글씨를 그릴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그렇게 걱정이 되신다면 일단 한 달은 '선을 그리며 장난을 친다. 낙서도 힐링이다.'라는 맘으로 시작하셨으면 좋겠어요. 한 달간 선 연습만 충분히 하면 캘리그래피의 반 이상은 성공하셨다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선을 그리는 행위가 글씨를 그리는 것에 거의 80%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선을 충분히 연습하고 나면 구도는 연습하면서 잡아나가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지금 연습생입니다. 사실 이 모임을 이끌어 가는 분들의 캘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에요. 모두 처음 선 그리기의 과정을 거쳐왔고 지금도 역시 선 그리기에 시간을 투자하시죠.
중요한 건 잘 그리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캘리그래피를 하는 그 순간 온전히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그려나가면서 행복감에 젖게 되니까요. 조금 실력이 향상되었다면 직접 쓴 캘리그래피를 소중한 누군가에게 선물해 보는 것도 멋진 경험이랍니다. 저도 '마음을 새기는 시간' 모임과 함께 하면서 책갈피를 만들어 선물했거든요. 받는 분들이 너무 좋아하셔서 제 기쁨이 두배가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