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 : 성욕을 처리하지 말고

by 유주얼

성욕이란 무엇일까? 성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첫걸음이다. 그런데 남의 성욕 말고 '나'의 성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어디로 가는지 살펴야 한다.

나의 성욕은 도대체 무엇인가?

감각에만 집중해보면, 성적 흥분을 느끼고 그 흥분을 극대화시킨 다음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성욕이다.

이것을 식욕에 그대로 대입시켜보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를 채워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일 텐데, 인간이 먹는 행위를 즐거워하고 또 미각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좋은 음식을 먹어서 건강하게 생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이 관계는 왜곡되어 우리는 미각의 진정한 욕구를 잃어버렸다) 아무튼 식욕은 생존을 위한 욕구이다.


그렇다면 성욕은?

‘생식을 위한 욕구’이다 - 라고 단순하게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당연히 성교의 가장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임신과 출산을 통해 후손을 남기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은 출산의 목적 없이도 성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성욕은 감각의 영역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뢰와 애정의 표현, 언어를 뛰어넘는 소통의 욕구도 성욕이 되고, 때로는 기쁨, 슬픔, 절망, 분노의 좌표 안에 존재하는 실로 다양한 층위의 감정과 심리에서 생겨난 무언가를 해소하거나 돌파구를 찾으려는 욕구, 혹은 지배하거나 복종하고 싶은 욕구 등에서도 성욕은 생겨난다.


성욕은 채워질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채워지지 못할 때도 많다. 욕구가 채워지지 못한 경우 계속해서 욕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욕구가 채워진 경우에도 다시 또 욕구가 생겨난다. 그리고 다시 생겨나는 욕구는 전과 동일한 것을 얻고자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횟수가 반복될수록 뭔가 좀 다르고 뭔가 변화된 차원으로 가고 싶은 욕구로 발전된다.

만일 성욕이 호르몬 작용이나 어떤 자극에 의해 채워져서 터지기 전에 배출시켜야 하는 어떤 축적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욕구는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금 민망한 예로, 우리가 굉장히 시원하게 배변을 했을 때, 다음번에도 이처럼 시원하게 배변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할 뿐이지, 더욱 기가 막히게 시원한 한 차원 높은 배변을 원하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욕은 어딘가를 향해 성장하고 변화된다.

이것은 성욕의 가장 기본적인 진실이다.

그런데 성욕이 어딘가를 향해 변화되어 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어디로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변태’라고 불리는 행위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나쁘게는 폭력과 범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렇게 불행한 일들은 성욕이 가야 할 방향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나의 성욕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내가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욕은 그 자체로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을 갖고 있지만, 실로 많고도 견고한 방해물들이 그 방향을 잃어버리게 한다. 잘못된 가치관, 부조리한 종교적 신념, 가정과 사회의 억압, 성의 상품화, 음지에서 생겨난 갖가지 왜곡들이 얼마나 고약하게 얽혀있는지 모른다.


‘성욕’이라는 한 아이가 있다고 치자. 이 아이는 잘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될 바탕을 갖고 있다. 그런데 부모는 아이의 모든 행동을 사사건건 잘못이라며 혼내고 선생은 아이를 수치스러워하고 더럽다며 비난한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마구 추켜세우며 가당치 않게 숭배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와 극도로 친해졌다가 이유 없이 아이를 배신하고 떠난다.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겪는다면 ‘성욕’이라는 아이는 자신의 본성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가기가 힘들어진다.


기왕 ‘아이’를 예로 들었으니 얘기하자면, 아동심리에서 말하기를 아이에게 뚜렷한 이유 없이 칭찬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성은 아름다워. 섹스는 좋은 거야.’라고 굳이 칭송하려 드는 것도 좋지 않다. 섹스는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다. 칭찬할 필요도 없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의 성욕을 있는 그대로 봐주기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 잘해도 사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풀리는데 말이다. 섹스에 관해서는 특히나 그렇다.


보통은 성욕이 생기면 그것을 ‘처리’하려고 한다.

풀어야 되나, 참아야 되나, 살려야 되나, 죽여야 되나를 결정하려 한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판단한다.

나에게 생겨난 이 성욕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유익한 것인가, 해가 되는 것인가...

판단은 섹스의 가장 나쁜 적이다. 판단은 진실을 가로막는다. 판단하지 않아야 성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생겨난 성욕을 성급하게 ‘처리’하려고 들기 전에, 먼저 나의 성욕을 가만히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들어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욕이 솟는 것을 느낀 단계는 마치 어떤 소리를 들은 순간과 같다. 그렇다면 이 소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지, 조용히 귀 기울이며 집중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 단계에 안내할 것이다)

이렇게 나의 성욕을 온전히 인정하고 바라보고 들어준다면, 성욕은 스스로 가야 할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그것은 영적인(Spiritual) 방향이다.


성욕은 영적인 에너지다.


성욕이라는 씨앗이 자라나 성숙되고 변화되고 다른 단계로 승화되면서 결국은 가고자 하는 곳은 영적인 차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하자면 깨달음, 해탈인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나 해탈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나처럼 세속적인 인간과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섹스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명제는 섣부르게 잘못된 해석을 낳기도 하는데, <화엄경>에 나오는 창녀 ‘바수밀다’ 이야기처럼 뭔가 마법적인 성교 한 번으로 단박에 진리를 찾게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또한 성교를 주야장천 열심히 하면 점점 해탈에 가까이 간다는 뜻도 아니고, 성행위 속에서 깨달음이 얻어진다는 얘기도 아니다. 설마 이런 오해까진 없겠지만, 성행위를 거룩하고 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어렸을 때 온갖 개구쟁이 짓을 하며 실컷 놀아본 사람일수록 커서 학문이나 일에 더 진지한 자세로 매진할 수 있고, 부모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본 아기일수록 자라나 의젓하고 독립적인 어른이 된다.

마찬가지로 성욕은 그 자체로 마음껏 발현되어야만 다음 단계의 욕구로 성장할 수 있다.


물론 깨달음과 해탈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고 어쩌면 별처럼 멀 수도 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성욕'에서 '해탈'까지 두 점을 선으로 이어놓은 그 방향으로 간다는 뜻이다. 만일 두 점 사이의 거리가 10만 km라고 할 때 평생 단 1mm를 간다고 해도 방향은 그 방향이라는 것이다. 성욕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깨달음이다.

이 길에서 먼저 만나야 할 것은 나의 몸이다. 벌거벗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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