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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Jan 15. 2021

불타는 남자

한 겹 더 들춰보는 연애 이야기 (5)

'마마보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다.

조회수가 상당한 연애 코치 유튜브 중에 마마보이를 분별하는 법, 마마보이의 행동 특성 등을 설명한 영상들을 보면, 연애 상대를 고르는 여자에게 있어 마마보이는 소시오패스만큼이나 반드시 피해야 할 유형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남자에 대해서다.

여기엔 당연히 마마보이도 포함되겠지만, 마마보이로 보이지 않는 멀쩡한 남자들, 혹은 부모와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하고 사는 남자들까지 포함될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존재 기반을 부모에게서 찾는다. 부모를 유난히 존경하거나 원망하기도 하고, 깊은 효심이나 죄책감, 혹은 적대감이나 철저한 무관심을 갖기도 한다.

부모의 생애를 세심하게 파헤치며 아버지 어머니가 감당했을 삶의 무게와 희로애락의 감정을 온전히 공감한다. 부모가 물려준 삶의 태도와 지혜, 교훈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자부심을 느낀다.

반대의 경우,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결핍 때문에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하면서 부모와의 불화, 관계의 단절 속에서 고독한 히어로가 된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여자들에게도 있지만 남자들에게 더 흔하고 그 정도가 더 심한데, 그렇다 해도 이런 남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연애코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특정 유형의 남자들을 속속들이 파헤쳐서 그런 유형을 만나면 안 된다거나, 그런 유형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내겐 그럴 능력도 없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남자들의 비극'이다.

나는 자칭 페미니스트이면서도 항상 남자들이 좀 불쌍하다고 생각해왔다. 사실 내가 페미니스트인 이유는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받는 불이익과 불평등에 분개해서라기보다는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야 여자와 남자 모두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허한 존재다. 모두가 상식으로 알고 있다시피, 남성은 주로 양(陽)의 성질을, 여성은 음(陰)의 성질을 갖고 있는데, 양(陽)은 불의 기운으로서 위로 솟구치고 밖으로 뻗어나가는 기운이며, 음(陰)은 물의 기운으로서 아래로 가라앉고 안으로 채워지는 기운이다.

음은 존재의 근원이며 기반이다. 음이 제대로 채워져 있어야만 양도 제 기능을 발휘한다. 물론 물이 화하여 불이 되고 불이 화하여 물이 되기에 음과 양은 상극이면서도 상생의 관계에 있지만, 음이 비어 허한 가운데 불의 기운만 동하는 상태를 음허화동(陰虛火動)이라 하여 동의보감에서는 가장 심각한 병으로 꼽는다.

  

그러니 본래 양의 기운이 성한 남성은 오히려 음의 기운을 보강해야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사회는 남성에게 더욱 강한 양의 기운을 요구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는 남성에게 주어진 특권과 혜택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을 부여한다.

범위의 크고 작음이 다르겠지만 남자는 늘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삶을 지지해 주는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린다. 이를 위한 출세와 성공은 남자의 당연한 미덕이다. 치열한 승부의 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활발하게 더 앞서서 더 강하게 더 높은 곳을 향한 노력을 경주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만큼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경쟁의 대열에 서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도 있고, 어떤 상황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뒤처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TV쇼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이 아니라면 어딘가로부터 끊임없이 요구받는 의무감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는 어렵다.

 

계속해서 불의 기운이 필요하다. 태우고 태우고 또 태워야 한다. 그런데 태울 연료가 부족하다. 존재의 성질 자체가 양인데 살면 살수록 더 양으로 치달아야 한다. 허해질 수밖에 없다. 어디엔가 뿌리를 내리고 싶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견딜 힘이 없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더듬어 뿌리내리게 되는 곳이 부모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부모가 가장 쉽고 안전하다. 부모가 아니라면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학교 선배, 직장 상사, 친구, 여자 친구, 아내, 자식, 세계의 부호와 재벌들, 신, 우주...? 어떤 건 가당치도 않고, 어떤 건 그럴 듯 하지만 너무 멀고 어렵다.

특히 효(孝)가 강조된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를 존재 기반으로 삼기가 수월하다. 그리하여 부모를 존경하든지 원망하든지 어떤 형태로든 존재의 기반으로 삼아 에너지를 끌어다 쓰게 된다.     


심하면 마마보이가 된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부모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어딘가 자유롭지 않다. 한 여자를 온전히 사랑하기가 어렵다. 부모의 죽음이라는 자연적인 순리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존재의 근원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기에 엉뚱한 곳에서 방황을 하다가 타락하기도 한다.    


알고 보면 남자는 참 약한 존재다. 유년기에도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 비해 정서적으로 훨씬 더 예민하다. 그래서 어렸을 때 아기 짓을 충분히 하고 실컷 어리광을 부려본 아이가 커서 오히려 더 씩씩한 남자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남자가 가진 태생적인 나약함과 불안정성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서 남자들의 비극은 시작된다.   


여성성을 기반으로 성인이 되는 과정보다 남성성을 기반으로 성인이 되는 과정은 훨씬 더 험난하다. 온전한 성인이 된다는 건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뜻한다.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남자들이 많은 건 그들 탓이 아니다. 남자가 존재 자체만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세상, 그의 능력과 역할과 성취의 결과로 가치를 인정해주는 오늘날의 세상 때문이다.    

그러니 본성에서부터 더 깊고 풍성한 근원을 가진 여자들이여,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애써 두려움을 숨기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 사람의 허한 내면을 헤아려보고 따뜻한 연민과 넓은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한 여성성이 결국 세상을 구원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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