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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가 내게 말한 것들

2019 베네치아 비엔날레 감상문

by CALM

예술의 정의는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예술의 정의는 어느 선상에 까지 와 있을까? 한때 예술은 유토피아를 표방하기도, 대중과 가까운 상호 이해적이기도, 때로는 충격으로 대체되기도 했었다. 올해 58회 차에 이른 ‘베니스 비엔날레’는 가장 요즘 미술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도 하는데, 금번, 그곳을 돌아보면서 오늘날의 예술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에 대해 다시금 이런저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유난히, 이번 비엔날레의 작품들 안에서 작품들이 모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고통스러운 생을 표현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많은 그로테스크들 안에서 고통스러운 생애를 엿볼 수 있었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은 상징 또는 은유라는 기법을 사용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보자면, ‘상징’과 ‘은유’, ‘알레고리’의 사용이 예술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설명을 듣거나 누군가의 해설문을 읽어야 겨우 ‘아, 이 작가는 이 얘기를 하고 있구나’를 알게 되는 건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다. 난해함이 느껴지지 않거나, 설명 없이도 관객 스스로 ‘이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있구나’를 생각하게 하는 작가가 나는 좋다. 비엔날레 안의 많은 비디오와 설치 작업 혹은 조형물들을 보면서,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여전히 들곤 했다. 미술 공부 열심히 했던 나조차도 이런데, 일반인은 어떻겠는가. 그들을 미술에서 멀어지게 하고, 지루한 것, 어려운 것, 난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미술의 방법론 가운데 하나인 '은유'인지 모르겠다. 은유를 사용할 때에는 좀 더 세련되고 다듬어져야 하는 까닭일 터이다. 어찌 보면 미술이 난해함을 무기 삼아 누군가의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은 전부터 들곤 한다.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여전히 감성 혹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Ed Atkins, 영국 작가

오늘날의 회화나 사진들의 소재로 흑인과 아시안이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유독 많다는 사실은 다시금 짚고 넘어가고 싶다.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흑인이 대부분이었고(왜? 마치 예술가들의 트라우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들었다.)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 작업에는 대부분 흑인과 아시아인 등이 등장한다. 어쩌면 제3세계 작가들의 대거 등장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흑인이나 아시아인만을 그리는 것은 아닐 테니, 컨템퍼러리 미술의 경향을 의식한 예술감독 또는 큐레이터의 선택일런지도 모르겠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위상을 고려해본다면 여전히 나는 미술계란 "그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지는 큰 판의 일부라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추상회화는 더 사생아 같이 느껴진다.

나는 근래, 예술은 벗어남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작업을 할 때, ‘나 스스로를’ 깨는 일이 가장 힘들고 어렵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이 아니라면 그럴 일은 없을 터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있고, 열심히 독자적인 기준을 만들어 나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경우 그와는 반대로, 이미 생성되어 있는 틀(개인적인, 사회적인, 예술적인, 역사적인 등등의 틀)을 깨고 더욱더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벗어나는 것이 예술의 기본이지 않을까, 누가 더 그 틀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깨고 나오느냐가 더 주목받는 예술가가 되는 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동시대(그러니까 지금!)'의 주목받는 작가와 작품들을 보면서, 누군가 틀을 깨고 나오면 다시 그가 만든 틀이 생기고, 또 그걸 깨면 또 새로운 틀이 만들어지고 있구나 싶었다. 뭘 보고 그렇게 느꼈냐 묻는다면 좀 설명하기는 힘든데, 작가들의 자기 복제 또는 어디서 본 이미지와 느낌을 강하거나 크게 만드는구나 등을 눈으로 확인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달까.


몇몇 작품에 대해 신선함도 느끼고 매혹도 느꼈다. 여행기에서 소개하였듯이, 이스라엘 국가관의 아이디어가 즐거웠고, 중국 작가인 Sun Yuan and Peng Yu 작가그룹 압도적인 작품들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Ed Atkins의 비디오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흥미롭기도 했고, TAREK ATOUI(레바논)의 소리 작업, RYOJI IKEDA(일본 작가)의 강렬한 빛 터널, SHILPA GUPTA(인디아 작가)의 소음 작업 등의 작품들은 놀라웠다. 이들 작가들은 대부분 관객을 새로운 예술경험으로 유도를 해 눈길을 끌었다. 관객을 압도하는 작품들의 행렬이 이러한 지경이니, '회화가 과연 오늘날의 예술에 해당하긴 하는가'라는 자괴감 까지도 느낄 정도랄까, 회화라는 전통적인 미술의 대표 선수는 이미 오늘날 미술 안에서 소외된 넘버 원 종목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비엔날레의 가장 큰 제목은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이다. 평론가 홍경한에 따르면, 흥미로움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인 의미로 읽히지만, 실은 우리가 누리는 안녕과 평화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한 것인가를 되묻는다는 역설적 의미라고 한다. 썩 동의되지는 않는다만, 그래서 그런지, 비엔날레에서 보여주는 작가들의 주제는 무겁고, 암울하다. 빛을 보여주기보다는 어두움을 향하는 느낌이랄까.


대부분의 작가들이 지구 상의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시대의 암울한 징후들. 소수자, 여성, 환경문제, 폭력, 미래... 등등의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고발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방법 등의 경계가 해체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예술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를 보자면 사회고발 TV 프로그램의 고급 버전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생긴다. 감동적인 작품을 보며 즐거워하고, 아름다움을 탐닉하거나 환호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이 시대의 정신적 고급문화에 속하지 못한다. 아픔을 어떻게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작가들의 역량을 평가하고 있다. 주제는 무겁게, 좀 더 무겁게 걸어가야 하고, 다만 그 주제를 어떻게 관객들이 서글픈 웃음을 짓도록 만들것인가만 골몰해 보인다. 왜?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보다 그게 더 있어 보이니까? 더 정의로워 보이니까? 더 포용적이며, 철학적이고 수준 높아 보이니까? 하지만 과연 그건 정당한 것일까? 우리에겐 더 이상 미적 감각에 대한 추구는 용인되지 않을 브로쥬아적 탐닉일 뿐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적어도 비엔날레에서는 시각적 즐거움, 미에 대한 환상을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은 싸구려처럼 느껴진다.


그런 방향성은 그렇다 치고, 그 외에도 비장함을 비장하게 보여주면 그거 참, 별로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 주제를 가장 뻣뻣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한국관의 작가들이었다. 세 명의 작가는 성소수자, 바닷가의 슬픔의 축제인 굿판, 여성국극을 조망하는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필자가 처음 베니스 비엔날레 소식을 접한 뉴스 기사에서는 탁월한 큐레이팅과 작가들 덕분에 한국관이 비엔날레 본부로부터 수상을 할 것으로 모두들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 역시 작품에 대해 기대를 했다만, 웬걸... 그들은 실패했다. 어두운걸 더 어둡게, 밋밋하게, 지루하게 표현했다. 그 자리를 빌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를 발표하고 싶어 하는 소박한 아동의 마음 같은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한국관의 비디오 상영; 여성국극

작가들이 자신이 선택한 주제나 소재, 창의적인 방법을 깊이 있게 모색하고 있는 동안, 큐레이터들은 작가들을 알고 평가하여 좀 더 넓고 깊이 있는 시각으로 그리고 세련된 방법을 찾아 전시를 이끌어 내야 하는 제2의 창의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 따라서 큐레이터들이 큰 틀에서 보자면 작가적인 마인드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일본관, 기계에 의해 악기가 연주되는 방,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알고 싶게 만들었다. 흥미 유발의 기법이 독특했다.

딱히 결론이 없는 감상문이긴 한데, 그래도 좀 정리를 해보자면, 이곳에서 느낀 미술적 감동은 이른바 말로 못할 지경이었다. 당연코 내 흥분감도 섞여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붓질을 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이 작업자들이 그야말로 딴 세상 사람들같이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에는 비엔날레 처방이 호되지만, 약효를 발휘하지 않겠는가고 생각하는 바이다.


여행 도중, 잠깐 생각했던 글을 쓴 것이니, 결론이 없더라도 참아주길 바란다. 좀 더 생각을 다듬을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스치는 생각들이니 감흥에 불과한 것이라 치부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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