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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Apr 06. 2022

[입원일기 #10] 신입생의 화려한 등장

걱정 많은 직장암 3기 환자 가족의 입원 일기

입원 24일 차. 어쩌다 보니 우리 병실을, 아니 우리 층을 지키는 왕고가 되어버렸다. 한 침대에 한 명도 아닌, 많으면 5명까지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우린 오로지 회복을 위해 제자리걸음 같은 싸움을 반복했다.




처음엔 옆자리 침대로 만난 것도 우연 같아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언제 퇴원하는지 이야기를 꼬치꼬치 나누었지만 그것도 나름의 힘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하루 혹은 이틀 만에 사라지는 옆 환자들이 부럽거나 그립기도 하고, 스쳐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누가 누군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어느새 우린 아주 본능적으로 옆 환자와 의미 없는 인사를 나누지 않는 환자와 보호자로 변해있었다.


신입생 들어왔습니다


그러던 오늘 꽤나 유쾌한 일이 있었다. “신입생 들어왔습니다!!” 이 한마디로 고요한 병실을 꽉 채우더니, 통성명도 없이 자신의 병명과 치료 역사를 랩처럼 읊어주던 사람. 환자복을 갈아입으라던 간호사의 말과 본인이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생각이 교차되면서 커튼도 치지 않고 바지를 내리는 실수를 할 뻔한 사람이었다.


그의 등장은 화려했다. 유머스러움과 너무 유별나서 당장이라도 피해야 할 것 같은 기운이 동시에 드는 그분은, 어쨌든 지난 25일 동안 우리 병실에서는 본 적 없는 특이한 캐릭터였다.


오! 장루다.

열변을 늘어놓는 그분의 뱃속에 인공 장루가 살짝 비췄다. 와! 우리 아빠 배에 있는 우주 정거장이 그분에게도 있다니! 아빠 배 외에 우리에겐 첫 장루였다. 그분이 무척 궁금해지던 찰나에, 그분도 우리 아빠 배에 있는 인공 장루를 발견했다. 나이스!


그 후로 그분의 랩 주제는 인공 장루로 바뀌었다. 나도 그분에 대해 호감도가 급상승했고, 궁금한 점이 하늘을 치솟았다. 그분은 나이가 70대인데, 작년에 직장암 3기 판정을 받고 인공 장루 달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현재는 항암주사로 치료를 받고 있단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아빠랑 나는 눈을 마주치며 “우리랑 똑같다”는 얘길 했다. 텔레파시란 이런 걸까.


그런데 그 뒤를 따르는 그분의 경험담은 생각보다 암담했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1주일 만에 살이 9kg이나 빠졌다는 사실. 어떤 날에는 밤에 자다가 장루가 빵! 하고 터져버려서 침대 시트는 물론, 침대까지 갈을 뻔했다는 심각한 에피소드. 하루에 거짓말 안 하고 30번에서 35번까지 장루를 비우고 있다는 이야기. 대충 이런류의 얘기들이었다. 희망적인 이야기는 별로, 아니 아예 없었다. 그리고 우린 셋이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유튜브나 의사들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인공 장루에 대한 신비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난생처음 만난 인공 장루 동지(?) 선배(?)로 기억되겠다.


아빠는 그분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그분을 만난 게 기본적으로 기뻤다. 어쩌면 위로를 빙자한 운명 같았다. 잠에 드는 시간까지도 본인의 존재를 열심히 뽐내며 코를 고는 이 분의 존재가, 난 이상하게도 감사하다. 이 생각의 뿌리를 파헤쳐 보면, 첫째 그저 잘 살아계셔 주셔서. 둘째, 우리가 가보지 않았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인공 장루에 대한 음지의 모습을 선명하게 해 주셔서.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당신의 존재가 고맙습니다.
오늘도 안녕히 주무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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