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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Sep 27. 2022

 사춘기! 너는 누구니?

사춘기와 갱년기의 조우 (1)



인간이 이상으로 여기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분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매사를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것은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 용기와 강인함을 지니고 자아를 철저하게 긍정하는 일이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순간은 언제부터일까? 프롬의 말처럼 자아를 철저하게 긍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지지하게 되는 순간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한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그 존재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인지 자신의 껍데기였던 엄마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태나고 자란다. 그러다가 그는 이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2007년 8월, 예정일을 한 달 반이나 남겨두었을 때 뭐가 그리 급했는지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니 엄격하게 얘기하면 아이는 세상에 던져졌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얘기했듯이 '인간은 자연이 던진 돌'이다. 그렇게 휙 던져진 아이가 가냘프지만 끈질긴 생명의 울음소리로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물었다.

"너는 누구니?"

지금까지 세상 어디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는 그렇게 내게로, 우리 집으로  왔다. 낯설지 않았던 건 아빠와 똑같이 닮은 입술뿐이었다. 도톰하고 맑은 선홍빛의 입술은 바로 9개월 동안 한 몸을 이루며  존재했분명한 나의 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무처럼 쑥쑥 잘 자라던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가을이 지나 추워질 무렵이었다. 아이는 학원을 다녀온 오후에 여느 때와 같이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곧 욕실에서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 소리 속에 뭔가 심상치 않은 작은 짐승 같은 흐느낌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 흐느낌은 조금씩 커지면서 욕실 문밖으로 삐져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나, 친구와 싸웠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조바심이 났지만 욕실 문에 바짝 붙어 귀를 댄 채 재촉하지  않고 아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아이는 눈동자가 벌게져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축축한 머리를 닦으며 나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우리 아들?"

한껏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눈물이 나와. 왜 이러지?"

아이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때 남편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 눈빛은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 마주치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고 남편은 늘 그랬듯이 그 자리에 서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가 그 말을 툭 내게 던진 후 다시 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 그렇구나."

잠시 침묵했다.

"안방에 들어가서 마음껏 울어. 울고 싶은 만큼."

아이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는 방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목이 쉬도록  울었다. 알 수 없는 아픔이 담겨 있었다. 조금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방에 들어가서 아이를 꼭 껴안았다. 계속 울도록 두면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아이는 내 품에서 다시 조금 더 울었다. 그 눈물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둘째를 돌보느라 자주 안아주지 못한 사이 덩치가 커진 아이를 꼭 안고 있으니 뭉클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때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새로운 길이 보였다. 무엇인가를 예고하듯이 낯설고 어두운 긴 터널 같은 길이었다. 사춘기의 신호탄 같은 순간이었다. 


좋아하는 삼겹살을 구워 먹이허기진 몸을 채워주니 아이의 눈빛이 금방 생기를 찾았다. 아무 일 없듯이 잘 지내던 아이는 또 몇 주 간격으로 욕실에서 펑펑 울고 충혈된 눈으로 나왔다. 아이에게 닥친 계절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진도가 높아서 압박감을 느끼던 영어학원을 정리했다. 대신 온라인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는 가벼운 수업을  신청했다. 아이는 잘 적응해 갔고 그렇게 쏟은 눈물만큼 훌쩍 컸다. 그 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신에게 더 집중했다. 목소리에는 반항기를 장착했고 행동은 주도적으로 변해갔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영어 학원을 알아봐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친구들과의 소통에 온 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던 아이는 사이클링을 시작했다. 허벅지의 근육이 점점 커지면서 그렇 자신의 몸을 만드는 재미에 빠졌다. 그 아인 매일 점점 자신을 긍정적으로 키웠다. 불룩해져 가는 근육만큼.




그러는 동안 나는 점점 컨트롤하기 어려운 아이가 힘에 부쳤다. 소리치고 반항하는 건 아니었지만 무슨 말이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순응하기만 하던 아이라서 더 힘들었다. 그래도 제때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 다행스럽다고 생각했고 최대한 예민한 아이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면서도 팬데믹과 겹치며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아이는 단단해지고 있는 반면 나는 나약해져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어디 있을까?'라는 칼날 같은 의문이 들었다. 어디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소모되고 소외되는 어떤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어느 깊은 우물 속에 갇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우울했다. 찾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찾기만 한다면 그 존재를 긍정하며 나도 아이처럼 용기와 강인함을 키워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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