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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Nov 25. 2021

 온전한 이해

영원한 숙제

열다섯 살 사춘기 남학생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다. 그 힘든 걸 꼭 해보려고 나름 고군분투했다.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다른 맏이의 성격처럼 의존적이고 과자 하나도 물어보고 먹는 아이였다. 자신의 앞니를 두 개나 부러뜨린 둘째와 달리 조심성도 많고 무엇을 해도 열심히 해서 하기 싫다고 그만둔 적도 없었다. 꾸준한 성격으로 태권도를 7살 때부터 중1까지 다녀서 4단 자격증을 땄다. 태권도 사범도 할 수 있는 자격증이다. 태권도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8년을 쉬지 않고 해낸 일이 있다는 건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크게 벗어나는 일은 지금도 없지만 어느 순간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전략을 구사하기 신공을 나날이 익혀가고 있었다. 처음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었다. 왜 저러는지 어떤 생각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해해 보려고 대화도 시도해 보고 책도 찾아보면서 혼자 고심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 시도를 해보려는 나의 피나는 노력이 무모한 것이라는 걸 아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해하려는 시도 중 가장 큰 난관은 내가 열다섯 살이 된 적은 있지만 남학생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물론 사춘기 아이라면 이런저런 자신을 찾는 방황도 있고, 마치 자신의 몸이 커진 만큼 다 큰 어른이 된 것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해라는 건 경험에 의존적이다. 어른들 사이의 오해도 왜 저러는지 자신은 안 그랬을 텐데라는 감정 때문에 골이 깊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로 50년을 살아온 나는 남자아이의 또래집단을 이해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큰 벽을 느꼈다. 어떻게 기를 써도 가까워지지 않는 평행선처럼 아이가 나와 다른 직선을 쭈욱 그리고 있었다. 우린 가끔 벽을 넘어서서 유쾌한 이야기도 잘 주고받지만 스마트폰 문제라든지 친구 문제와 관련해서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아니 높은 벽 때문에 보이지가 않았다.


더 큰 난관이 있었다. 열다섯 살의 방황하는 마음쯤은 기억이 희미하게 나기도 하지만, 스마트폰이 있는 열다섯 살은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질풍노도의 시기니까!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뜻이다. 24시긴도 모자라는 스마트폰 안의 무궁무진한 세계는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시간마저도 빼앗아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때도 정신을 흔들만한 여러 가지가 있긴 했지만 시간이나 공간적 제약을 받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가만히 방문을 닫고 불 켜는 것도 잊은 채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면 학원 갈 시간도, 엄마의 잔소리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무아지경의 세계에서 헤엄칠 수 있다. 온갖 sns로 팬데믹 속에서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과 이 세상 모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남발하며 자신이 인싸가 되어간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의 적은 머리에 뿔이 달리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온갖 무기를 장착한 스마트폰이었다.


주변에서는 초등 3,4학년에 (지금은 1학년 이전에 ) 쥐여줬지만 독한 엄마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중1까지 버텼는데, 학교에서 중2 개학식 날 반톡방을 만들었다. 그것도 수업할 때마다 쓰는 톡 방이라서 다른 교과 선생님들까지 다 계시는 톡 방이었다. 그러니 급한 마음에 그 다음날 패드를 손에 들려 보냈지만 아이는 수업 시간에 꺼내지도 않았다. 바로 스마트폰을 사양 낮은 걸로 사면서 예상했다. 긴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저 아이에게 맡기라는 말은 칼을 손에 쥐여주고 다치지 않게 잘 놀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와 남편은 거의 아이에게 맡겨두긴 하지만 최소한 밤잠은 재우기 위해 반납을 정했고 조심해야 할 스마트폰 이용에 대한 잔소리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깊이 생각하다 보면 실존적인 회의감도 든다. 내 몸속에서 태어난 존재라 해도 나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아니니까.(어떨 땐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아이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물음도 계속 이어졌다. 아이에게 나는 얼마나 숨 막히는 엄마인지 물어보고 싶고 그 속에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몇 달 전 둘이 밤 산책을 가서 한 시간쯤 걸었던 적이 있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아이 팔짱을 끼고 걷다가 갑자기 아이들이 어릴 때가 생각났다. 아직 큰아이가 어렸는데 네살터울의 둘째와 장난을 어찌나 치는지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야단을 심하게 쳤다.


그때가 상처로 남았을 거란 걱정에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엄마가 정말 몸이 힘들었고 그러다 보니 마음까지 힘들었다고 나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잘 하고 싶었지만 부족했다고, 앞으로 더 잘해보겠다고 얘기하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그런데 아이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가 뭐가 미안하냐고 괜찮다며 아이도 내 눈물을 닦아주며 울었다. 나는 나보다 더 커버린 큰아들을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런 시간이 있었다고 해서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다. 마음을 전할 뿐 어떻게 내 마음을, 그 아이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각자 서로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했을 뿐이다.


결국 온전히 이해하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소중한 한 존재가 저기 저 우물 속에서 덩치를 키워가고 있음을 인정하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꾸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니 더 힘들었다. 그런데 같이 사는 남편도 그 행동과 마음을 다 이해하긴 힘들고 정확히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전달하는 것조차 힘들다. 하물며 아빠보다 키가 커버린 열다섯 살 아이를 이해가 안 된다고 속상해하기보다는 그 아이의 존재가 얼마나 내게 귀중한지 그 아이가 나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면 된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온전한 이해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한다.
Everything that I understand, I understand only because I love.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말처럼, 이해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다. 괴물 같은 스마트폰 속에서 새로운 자신의 아이템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그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같은 공간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방문 너머 저 우물 같은 곳에서 내 아이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키워서 성큼 큰 어른으로 문을 열고 나올 것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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