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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식 Nov 03. 2022

나의 경험은 경력사항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윤준식 사용설명서(3)] 2022.11.03.

대체 그간 나는 어떻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것인가? 8회분의 리퀘스트가 있었는데, 깜빡 잊어버린건 그렇다치고 5개월만의 브런치 방문이라니... 오래간만에 생각난 김에 여전히 산책없는 '남산골 산책일기' 한 편을 더 남기고 지나가고자 한다.


지난 회에 이어 이번 회도 "준식씨의 특성 시리즈"로 이어 간다. 오늘은 그 세번째 '경험'편...

    *지난 편

         (1편) 지식 https://brunch.co.kr/@ventureman/31

         (2편) 기술 https://brunch.co.kr/@ventureman/32




(3편) 경험

"40가지 직업을 체험하고 소설을 한 편 써야겠다!"

철모르던 시절의 말이 씨가 되었다. ㅠㅠ


고교 시절... 생각보다 빨리 수험의 압박감에 시달리던 나는 책의 세계에 빠졌다. 그런데 역사, 철학, 교양의 세계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다. 김용 원작의 무협시리즈나, 팬더 추리문고 시리즈, 톰 클랜시의 군사소설, 기타 덕질에 적합한 잡서들을 탐독하며 준비된 B급 문화 폐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올덕-만물의 덕후의 기초를 닦게 된 것은 김용 소설에 반해 나만의 소설을 쓰려던 우연이 필연이 되면서 부터다.


"김용의 무협소설이 20세기의 유산이라면, 21세기의 무협은 우주를 무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이른 바 스페이스오페라 장르에 해당하는 '스타워즈'급의 사이언티픽 판타지를 펼쳐보겠다는 장대한 구상에 빠진 것이다. 나름의 세계관을 구상하고 주요 등장인물의 개성과 성격, 각 인물의 운명을 결정지을 플롯을 설계해 당시 고교생 노트로 3권 정도의 프롤로그와 1권 정도의 설정을 틈틈이 적어나갔다.


덕택에 강제적으로 진행되던 야간 자율학습 시간은 작품을 구상하고 저술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소설의 설정을 충실히 해나가기 위해 다양한 지식이 필요했고, 도서관은 보물창고, 발굴해낸 잡서들은 소중한 정보의 보고로 나의 새로운 교과서였다. 


그러나 이런 꿈은 고3 여름방학을 앞두고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당시 을지문고를 통해 <은하영웅전설>이 출시되었는데, 이 책이 나의 설정을 더욱 충실하게 해줄 것 같아 꼭 참고하고 싶었다. 10권이라는 분량이 부담스러웠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탐독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1권의 첫 장인 '암리츠어 전투'가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것이었다. 3차원 공간이자 동서남북 구분이 없는 우주공간에서 2차원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점, 대장 계급의 장성이 수백만의 병력을 지휘한다는 점 등 섬세한 설정은 엉터리였지만, 캐릭터의 강렬함, 가상의 역사를 정치사회적 논리로 풀어간다는 점이 나와 달랐다.


[을지서적판 <은하영웅전설> 이미지는 아래 링크 참조]
참고로 을지서적에서 펴냈지만 해적판이었다.
https://blog.naver.com/minist9/10146306632

한편, 전반적인 세계관과 설정이 너무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고교생활 2년 반을 쏟아넣은 내 소설과 똑닮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세계관은 가까운 나라 일본까지 먹힌다는 걸까? 김용의 소설이 바다 건너 한국에 왔던 것처럼, 나도 해외독자로부터 사랑받는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으로 독서에 열중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금새 소멸되었다. 시리즈 중반부에서부터는 절망감이 컸다. 그래도 완결은 봐야겠기에 3일만에 전권을 읽었고, 절망이 커진 나는 절필하고 말았다. 내가 쓰던 소설과 설정이 너무 같았고, 내가 디테일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간과했던 중요한 점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은하영웅전설>의 아류작 수준을 넘어갈 수 없었다. 특히 세상 경험이 없는 소년 입장에서는 대국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든가 권모술수의 연속성을 그려낼 방도는 더더욱 없었다. 반쯤 울며 프롤로그 초고와 설정집을 폐기했다.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소설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이때부터 진지하게 대학수험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소박하지 않은 꿈을 소박하게 꾸고있었으니... 대학에 들어가면 매월 1가지씩 40가지 일에 도전해 경험해보고 나서 직업들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을 쓰고 말겠다는 더욱 엉뚱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물론 이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경험해본 일의 가짓수는 5가지 미만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이 녹녹치 않았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살다보니 혹은 살자고 뛰다보니 이런저런 직종을 전전하게 되었다. 새삼 일일이 세어보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나의 지난 삶은 되도 않는 몽상가의 삶이었기에 절박함이랄까 처절함이랄까 극한에 이르는 무엇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따라서 드라마틱한 소재도 찾아내지 못했다. 또한 그렇게 전전하다보니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사람, 평범하지 않은 일을 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게 되면서 전전한 일들의 가짓수는 의미가 없어졌고, 심후한 내공의 공력에 이르지도 못했다.


몇 년 전 인스타그램을 이용해보면서 엽편소설(초단편소설) 쓰기에 도전했지만, 팔로워들 중 어느 누구도 나의 소설을 소설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두 특이하지 않은 나의 일상이라 여기며 소설의 전개에 따라 나를 격려하거나 꾸짖거나 축하해주는 일이 벌어져 연재를 중단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너무 경험적인 사람의 일면을 보여서 탈이 나고 말았다.


사실 나는 경험 이전에 직관에 의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경험은 직관의 실천이거나 직관의 검증을 위한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경험해온 일은 경험이 끝난 이상 내게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지나온 일들과 경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니까... 경험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더 중요하다 여기기 때문에 경험이 끝나면 그 경험을 뒷방 창고에 던져넣어두고 다른 일에 몰두한다는 나의 성향을 말하고 싶었던 것 뿐...


경험 대목을 쓰면서 후회하는 것은 나의 경험을 상품화하지 못했던 점이다. 다른 사람의 권유에 의해 저자가 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간파하지 못했던 점은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걸 콘텐츠화하는 것이 의미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나의 경험은 이력서에 정리할 수 있는 실적처럼 건별로 나열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어떤 맥락? 혹은 내러티브로만 설명할 수 있어서 한계가 있다. 그래서 '경험'을 이야기함에 있어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의 이야기'와 같은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저술에 도전하고 있고, 이를 독립출판으로 풀어가고 있다. 내가 경험한 일을 서책으로 남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마치 영화 <자산어보>의 정약전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서 정약전이 경세가로서의 저술보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어패류와 해초에 대한 책을 저술한 것처럼 말이다.


하하... 이렇게 나는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나의 경험을 설명하며 미꾸라지처럼 도망을... =3=3=3

마지막으로 아래에 남기는 이미지는 나의 창업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 표지다. 나의 경험에 대해선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다음 4편은 '성격'편이다. 그땐 또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


지금은 재고가 없어 구입할 수 없다. 2016년 책이라 시의성이 떨어져 출판사에서 재인쇄 계획도 없는 책이다. 언젠가 2권을 써내야 하는데 2023년에는 만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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