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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Apr 14. 2023

슬픔 옆에 '아빠'


국어 시간에 <단어수집가> 그림책을 아이들과 함께 보았다. 제롬은 세상 많은 것 중에서 낱말을 모으는 아이이다. 눈길을 끄는 단어, 기분 좋은 말, 노래 같은 말, 근사하게 들리는 낱말, 간단하지만 힘이 센 말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롬이 천장 꼭대기까지 위태롭게 쌓인 낱말책을 옮기려다가 책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애써 분류해 놓은 말들이 모두 섞여 버린다. 코뿔소 옆에 밀라노, 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나란히 있으리라고는 상상해보지 않은 단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롬은 시를 쓴다. 시로 노래도 만든다. 뜻하지 않았던 단어가 이어지며 생겨나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우리도 제롬이 되어 ‘기분이 좋아지는 말’, ‘소중한 단어’, ‘간단하지만 힘이 센 말’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섯 명의 중학생이 눈알을 굴리며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돌아가며 한 단어씩 외치면 내가 칠판에 받아 적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말’로는 대단해, 도와줄게, 응원해, 예뻐, 토요일, 방학. ‘소중한 단어’로는 물, 공기, 고양이, 급식, 컴퓨터, 핸드폰, 넷플릭스. ‘간단하지만 힘이 센 말’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아령, 용기. 아이들은 방학, 급식, 넷플릭스 단어를 보며 웃었고, ‘미안해’와 ‘사랑해’ 같은 단어에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단어를 이야기하고 떠올린 이유를 말하는 동안 윤제는 뭉툭한 둘째 손가락으로 여러 번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아이들이 3번쯤 돌아가며 말한 후, 윤제는 입을 떼었다. “아빠”.


4월 3일 지난 월요일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조금 이른 시간인데, 누굴까 궁금해하며 전화기를 쳐다보니 윤제 어머니다. “윤제, 윤진이 아버지가 집에서 갑자기 죽었어요. 4월 1일에 그렇게 되어서 오늘이 발인이네요. 어떤 서류가 필요할까요? 준비해서 윤제 편으로 내일 보낼게요.”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말투. 분명 윤제, 윤진이 아버지라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윤제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라고 되물었다. 설마 학생의 아버지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요, 윤제 아빠요.” 이게 무슨 상황일까.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서류는 사망진단서 1 통이면 된다. 하지만, 서류를 떼기까지의 과정이 그냥 단순한 행정업무처리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필요한 서류는 그것이라고 콕 집어 말을 하지 못했다. 일장 치르고 발인도 했으니, 다음 날은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머뭇하며 내가 겨우 한 말은  “5일을 쉬어도 되어요.”였다. 고인의 명복을 기리는 말도 입 밖으로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삼켰다. 다음 날, 등교 시간이 되도록 윤제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제가 너무 피곤해서 못 보냈어요.”, “윤제 아직 자고 있어요.” 어떤 슬픔은 뒤늦게 찾아온다. 전화 온 첫날과는 달리 날이 지날수록 윤제 어머니 목소리에 피곤함과 상실감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윤제는 집에서 며칠을 더 보내고 등교했다. “아빠가 안 일어났어요. 윤진이 누나가 발견했어요. 아빠 심장이 안 움직여서 119가 왔어요.”윤제 어머니는 장례를 치르느라 경황이 없어서 아이를 근처 친척집에 맡겨 아빠가 하늘나라로 떠난 구체적인 정황을 모를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윤제는 모두 알고 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수업 시간에 자주 사용하는 감정카드가 윤제 눈에 들어왔나 보다.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캐릭터가 그려진 카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글씨를 띄엄띄엄 아는 열네 살 윤제가 고른 감정 카드는 ‘슬픔’이었다.     

 


더 많은 낱말을 알게 될수록 여러 생각과 느낌과 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

단어가 주는 파장을 알았던 제롬이 살랑살랑 바람 부는 어느 날, 지금까지 모은 단어를 모두 꾸려 수레에 담아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제롬은 싱긋 웃으며 낱말들을 세상으로 흘려보낸다. 윤제도 세상에서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을 잘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따뜻한 기억 한 조각은 가슴에 꼭 남겨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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