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또 입원을 했다.
수술 후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입원이 아니었기에 간병인을 고용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나를 포함한 딸들은 입을 모아 아빠에게 말을 했다. 아빠는 간병인을 고용하고 싶어 했지만, 충분히 걸어 다니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엄마에게 간병인은 조금 과한 느낌이었다.
아빠는 늘 그래왔듯이 엄마의 간병인 고용을 만류했던 딸 셋 중 어느 한 명이 예전처럼 엄마의 간병인 역할을 해줄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설마 아니, 당신이 간병인으로 낙점되어 엄마와 함께 병원에 들어가게 될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듯이 우리의 한 표 한 표가 아빠를 향했을 때 당신께서는 무척 당혹스러워하셨다. 예상치도 못한 딸들의 반격에 유일한 자기 편인 엄마의 곁에 하는 수없이 남게 되었다.
엄마의 병명을 묻는 우리 가족들의 질문에 담당 의사는 늘 말을 아꼈다.
엄마의 문제는 늘 '약물 오남용'이었다. 엄마의 병증도 다 그 약물들에 의해 연쇄적인 부작용이 일으키는 증세였지만 엄마는 결코 그 많은 약들 중 어느 하나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약물의 위험성에 대해 전문가인 의사가 경고를 하고 딸들이 달래고 어르다 급기야 서로 언성을 높이는 단계가 될 때까지 약을 엄마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술이나 담배만큼 약도 사람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약에 끌려다니고 놀아나는 것은 어찌 보면 엄마가 아니라 평생을 엄마의 비보에 일희일비하는 세 명의 딸들이었다.
아빠는 대체로 잘 피해 갔다. 엄마를 염려하고 걱정하고 누구보다 사랑했을지언정 엄마의 불행은 아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엄마가 입원해서 힘들어하는 동안은 아빠도 다소 풀이 죽어 보이고 외로워 보이기는 했으나 딸들처럼 학업이나 생업에 혹은 일상을 전면 비상 상태로 돌려야 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아빠는 그저 조심하고 때로는 소심하게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병원으로 면회를 와서 엄마를 다독이는 듬직한 가장 역할을 할 뿐이었다. 엄마는 그런 아빠의 역할에 만족하는 듯했고, 둘 사이에 큰 이견은 없었다.
우는 엄마와 다독이는 아빠가 있었지만,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이는 기어코 세 딸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언니가 유치원 때, 내가 그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시름시름 아팠고 독한 약들을 먹고 일찍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언니와 나는 엄마가 깨면 내복을 입고 쫓겨날 것이 분명했으므로 최대한 조심조심 놀았지만, 대부분 들켜서 벌을 서거나 추운 겨울 내복차림으로 바깥으로 내쫓겼다.
엄마의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유사 치매 증상이 발현된 것은 약 십 년 전부터였다. 육십 대 중반인 엄마는 돌연 십 대 후반의 과거로 시간 여행 중이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아빠를 자꾸 '시커먼 아저씨'라고 하며 딸들에게 아빠의 흉을 보기도 했다. 아빠와 금실이 좋았던 엄마가 아빠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데 세 딸들은 희한하게도 알아보았다.
언니가 "엄마, 나는 누구야? 내 이름 뭐야?" 하면,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단점이라면 다섯 살 아이처럼 말을 거르지 않고 출력하듯이 줄줄 내뱉었기 때문에 평소 엄마가 표 내지 않았던 속마음들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자꾸 언니에게 아빠를 힐끔거리며 "저 아저씨 이제 자기 집에 가라고 해."라고 속삭였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부모님과 가까운 병원에 당일날 바로 입원을 한 엄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최근 먹어 왔던 약과 처방전을 병원에 제출했고, 의사로부터 또다시 병원에서 주는 약 외에는 먹을 수 없다는 처방을 받고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약물로부터 해방된 엄마는 제 멋대로 풀려버린 태엽을 삼분의 이쯤 다시 감고 제 자리인 엄마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삼분의 일만큼의 덜 감긴 태엽은 세 딸들의 몫이었다.
엄마의 퇴원은 곧 세 딸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두어 달간의 주말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기도 외곽에 사는 부모님과 서울 시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세 딸들도 한 번 모이려면 여간 쉬운 게 아니었지만 주말 근무가 있는 사람은 평일날, 평일에 오지 못하는 사람은 주말에 시간을 내어 일주일에 한 번 당번제로 돌아가며 부모님 집에 들러서 엄마의 상태 호전도와 식사, 청소 등을 챙기며 사실상 주 6일 근무를 지속해야만 했다. 우리가 방문하지 않는 평일에는 아빠가 엄마의 식사와 집안일을 챙겼다. 꽤나 부지런한 편이었던 아빠가 욕실 청소와 빨래를 하긴 했지만 집안 청소는 다시 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이런 식의 입퇴원의 사이클이 몇 년 간 반복되었고, 집으로 복귀하는 첫날부터 엄마는 시험대에 놓이게 되었지만 대부분 과감하게 약의 유혹을 끊어내지 못했다. 감기 몸살로 동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 이비인후과에서 비염으로 처방받은 약, 방광염으로 처방받은 약, 잠을 잘 못 자서 처방받은 약, 변비약 등 또 약은 점차 종류와 가짓수를 늘려갈 것이다.
아빠는 엄마의 병이 제대로 된 의사(명의)를 만나지 못해 정처 없이 표류하는 그 무엇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한 때,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명의가 아니라,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면서 약을 먹지 못하게 체계적인 감시를 하는 로봇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명의'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엄마의 병을 이야기할 때 아빠는 자주 '왜 못 고치는 거야, 이렇게 기술이 발달했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병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들이는 노력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오로지 약물이나 의학의 힘만으로 몰라보게 건강해진 엄마를 기대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아빠의 이런 무지와 몰지각이 말해주듯 불행은 늘 우리 곁에 맴돌며 언제쯤 우리 집의 벨을 누를까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엄마를 위해 세 딸들이 들인 시간과 노력, 한숨과 염려는 언제나 그랬듯이 하찮고 쉽게 무너질 것이다.
눈앞의 불행을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덮어 놓고 구원을 기다린다면, 신도 그런 사람들은 외면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묻는 말에 '아무 의미도 없음'이라고 답을 적어 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