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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날엔떡국 Jan 27. 2024

쉬는 날 집에만 있긴 아까워

나가도 할 건 없지만

*알려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작가의 미숙한 인터넷 사용법으로 본 글이 중복 발행되었습니다. "사유의 사유: 2화"에 올라갈 예정이었던 본 글이 일반 글에 올라가여 재발행합니다. 구독자분들을 비롯한 여러 독자분께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드립니다.




   워낙 집에 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외출이란 정말 큰 결심이 필요한 행동이다. 가령 날씨가 좋지 못해서, 머리를 감지 않아서 혹은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등 외출을 반려하는 데 언급되는 변명들은 많고도 많다. 보통 약속이나 일정이 있지 않은 날에는 집에서 느릿한 오후를 보내곤 한다. 그렇게 집에만 있다 보면 답답할 것 같으면서 생각보다 꽤 행복하다. 구석구석 밀린 청소를 마치고, 냉장고를 뒤져 시끌벅적 요리를 하고, 뜨거운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책도 읽고, 그러다 나른해지면 낮잠도 자고, 날이 어둑해지면 불을 꺼 로맨스 영화도 보고. 생각해 보면 온종일 집에만 있었다고 해서 하루가 덜 보람차고 아쉬워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집에만 있는 걸 두려워하는 데에는 생각 없이 침대에 퍼질러 누워서 핸드폰만 만지다가, 대충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만 자다가 하루가 다 가버리는 그런 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어느덧 어둑해지고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 그때 느끼는 후회와 괴로움 심지어는 자기혐오가 방 안의 공기를 한층 불쾌하게 만든다.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쐴 걸…'

   그러고 나면 다음번에는 일찍이 나갈 준비를 마치고 신나게 밖을 나선다. 아무래도 밖에 있으면 새롭고 재미난 일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추운 겨울에도 보도 귀퉁이에 당당하게 피어있는 꽃송이, 초록불에 맞춰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오토바이, 승객들을 반기는 버스 기사님의 따스한 인사와 그렇지 못한 냉혹한 운전. 밖에 펼쳐지는 세상을 구경하는 건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럴 때면 '밖에 나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친히 이렇게 밖으로 나왔는데, 이 동네에서는 할 게 이렇게도 없나'라는 고민을 많이들 해봤을 것이다. 우리는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외출이 그저 바깥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빵집에 들러 갓 나온 빵들을 고르고, 꽃집으로 향해 신선한 꽃향기를 맡고, 옷가게에서 새로 들어온 옷들을 구경하는 것. 영화관에 들러 흥행 중인 영화 한 편을 보고, 여유를 갖고 생각에 빠지려 산책을 하고, 밥때가 되어 저장해 놨던 맛집을 찾아 헤매는 것.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세상에 빠져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외출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밖에서 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만 틀어박혀 하루를 날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나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오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뒤섞여 우리의 편안한 휴일을 괴롭게 한다. 사람은 밖에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해야 된다라는 말은 누가 시작했는지, 의도가 뭔지 궁금하다. 일상에 환기를 시켜줘야 한다는 의견이면 적극 동의하지만,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해야 한다는 의견이라면 그에게 되묻고 싶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친구를 만나야 하면 왜 만나야 하는지. 아마 대답은 "그냥, 심심하니까." 정도이지 않을까.

   인간은 고독의 시간 동안 스스로 사유를 하며 성숙해진다. 그래서 타인과 맞닿을 수 있는 밖을 나서는 건 고독에서 멀어지는 일이고, 성숙한 사람일수록 에너지를 빼앗긴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고독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죽음을 선택한 자들만이 고독을 온전히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독의 표상이라고 봐도 좋을만한 고양이만 봐도 그들은 종종 인간을 향해 다가온다. 아무리 고양이 같은 인간이라도 세상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설득도 하고 타협도 하며 희생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스스로가 신에 필적할 완전한 인물이 될 거라는 의지는 헛된 희망이고, 단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만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고독을 저버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세상과의 소통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비롯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진지하지만 꾸며졌으며 덜 솔직하다. 그리고 오래가지 못하여 기억 속에서 금방 잊힌다. 고독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어떠한 대상을 관찰하려는 의지만이 진솔한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고 깊이 새겨질 수 있다. 그리고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연습이다. 연습에 성실한 자만이 시험에 겁내지 않고 빛나는 법이다.


   이쯤 되면 밖을 나서는 선택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 같다. 하루종일 집에 박혀있는 것 또한 잘못이 없다. 단순히 심심한 마음을 달래려 밖을 나서놓고는 별일 없는 오늘에 운이 좋지 않았음을 탓하지 마라. 먹고 눕고 자며 단조롭게 보냈다고 의미 없는 하루를 살았다고 말하지 마라. 스스로 매 순간 진심이었는가 솔직할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원인은 자신에게 있고, 최선이라는 자기 합리화에 숨어 하루를 죽인 건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의 하루는 오직 그대의 것이고, 그대의 선택지는 세상이 그려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그려야 하는 빈 도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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