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한 번째 일기 - 거기 있던, 아직 있는 너에게
#열한 번째 일기- 옥상 위 푸른빛
거기 있던, 아직 있는 너에게
거기. 거기 잠시 있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가장 자유롭고 행복했지만 가장 내면의 싸움이 들끓었던 20 대.
내가 좋아하던 곳은 학교의 옥상이었다.
너무 강렬해서 녹아 없어질 것 같던 뉴질랜드의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바닥에 두께 없이 누워 있던 곳.
너무 강한 햇빛은 오히려 암흑 같을 때가 있다. 암흑 속에 잠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부유하다가 다시 눈을 뜨면, 눈꺼풀 뒤의 어둠과 밝은 빛의 세상 사이에 잠깐 푸른 그늘의 세계가 스쳐 갔다.
현실의 강렬한 빛에 눌려 내가 이지러지는 것 같을 때, 조용히 뒤에서 고였던 서늘한 그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안개 같은 세계가 그리워, 자주 옥상에 누워 뜨거운 햇살을 버텼다.
기형도의 시를 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내가 알던 한국의 시라곤 이민 오면서 가져온 ‘한국 현대 시선 100’ 같은 책에 실린 김소월, 서정주, 등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들의 시가 전부였는데, 90 년대 말 인터넷의 혜택을 받아 밀려놓았던 한국어의 쓰나미가 터졌고, 기형도의 시도 그렇게 바다를 건너 내게 닿았다.
종이가 아닌 모니터의 글을 읽는 것도 생소하던 때였지만 기형도의 시에서 나는 내가 그리워했던 푸른 안개 같은 세상을 봤다. 가슴이 너무 아려서 몇 날 며칠을 울다가 읽고, 읽다가 울었다.
그때, 무엇을 위해 내가 그렇게 울었는지, 기형도의 시에서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는 말하기가 힘들다. 말하는 순간 그건 그때의 그 마음이 아닌 것 같다.
그저 기억나는 건 처절하게 슬프고 외로웠던 그 시가 꼬옥 안아주었던 내 마음.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 빗겨 서서 떨고 있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위로. 강의도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시를 읽으면서 며칠을 울 수 있었던 20대의 젊음과 쓸모없이 게을러도 괜찮았던 자유 - 그 기억의 빛만 그립게 남아 있다.
시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시 안에서 명징하게 구축되는 아름다운 진공의 공간을 사랑한다.
모든 것이 점점 모호하고 희미해지는 삶 속에서 내가 표류한다고 느낄 때, 시를 읽으면 그래도 의미를 건질 수 있었다. 하나의 이미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푸른 고드름처럼, 눈의 결정처럼 촘촘히 구축된 그 세계는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시의 세계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끝내 답은 모르더라도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현존재가 거주하는 터, 내가 나 다울 수 있는, 나를 보여주는 고유의 공간 – 사유의 집은 나만의 목소리, 즉 나만의 시로 드러난다.
그러한 언어를 건축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삶이라는 공간에 시(詩)를 쓰는 것이라며 하이데거는 “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Poetically Man Dwells.)”라고 선언한다.
건축을 업으로 삼고 공부하고 일하면서 하이데거의 이 선언을 늘 마음에 품고 있다.
시 속의 공간을 짓고 싶고, 공간 속의 시를 짓고 싶다. 언어의 의미와 리듬을 벽돌처럼 쌓으며, 충돌시키며, 해체하면서 태어나는 이미지, 그 시공간은 시인의 목소리로 재해석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하나의 우주이다. 이렇게 태어나는 시 속의 공간은 읽는 자와 쓰는 자에게 쌍방향으로 침투하고 반향을 일으키면서 점점 더 큰 공간으로 울려 퍼진다.
건축 또한 그렇다. 존재가 자연의 터, 시간의 터, 사유의 터를 오래 응시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터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터에 스며있는 우주적 질서가 그것을 발견한 자의 내적 질서(삶)를 만나서 질문, 강화, 또는 재창조될 때, 그 지점에서 공간의 시(詩)가 흘러나온다. 마음의 풍경은 존재의 집 - 보이는 집과 보이지 않는 집이 된다.
집에 거주하는 이가 지금껏 걸어온 길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걸어갈 길을 인도하면서 같이 나아간다. 사람과 공간은 서로 공명하면서 서로를 찾아주고 서로의 꼴을 빗는다. 모든 과정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된다.
(너는 나의 집, 0 번째 편지, ‘프롤로그’에서 썼던 글)
시 속의 공간과 공간 속에서 찾아지는 시를 좋아하고 구축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 저편에는,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해있지 못한다는 ‘경계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이 들어있다.
물리적인 소속, 국가, 집이 없는 유목민 같은 나,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이민자 1.5 세의 경험이 만든 부재로서의 나.. 부서진 언어와 잃어버린 언어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시를 만났다.
시를 통해 나는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살짝 빗겨 나 있는, 그러나 빛이 닿으면 찬란히 빛나는 그 날카로운 고드름 같은 세상 속에서 나도 나만의 자리를 찾고 싶다.
몇 달 전, 가끔 필사하는 시와 음악을 나누어주시는 지인이 노래로 만든 기형도의 ‘빈집’을 들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노래를 들었을 때,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라는 첫 구절부터 눈물이 터졌다.
빈방에 오롯이 갇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엉엉 울면서 이 시를 읽었던 스무 살의 내가 그 빈 집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20 대에 찾아간 그 집은 슬프고 안쓰러웠는데, 40 대에 찾아간 그곳은 정답고 그리웠다. "아름답고 쓸모없던" (*) 나의 난춘 (亂春)*.
초봄의 햇살도 부대껴서 힘들었던. 하늘과 맞닿은 거기에,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어 줘서 고마웠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김민정 시인님의 시집 제목에서 인용했습니다.)
(*"난춘" 제가 너무 애정 하는 밴드, 새소년의 노래 제목입니다.)
#혼자, 또 같이 듣고 싶은 노래:
*새소년, ‘난춘 (亂春)’ (출처: 새소년 (SE SO NEON Channel)
(열한번째 공간|공감 이야기, "시, 공간의 노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