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덟번째 일기 - 공간의 결
# 첫 복귀 프로젝트, 새로운 시작
젖먹이 아이를 떼어놓고 일터로 복귀한 뒤 맡은 첫 프로젝트였다.
세계적인 금융 그룹의 창립 멤버이자 호주 재계의 거물이신 분의 집. 이 도시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땅이 건물부지였고, 클라이언트는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는 유명인. 겁이 덜컥 났다.
우리가 맡은 프로젝트는 그분과 아내가 오로지, 온전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분은 상황에 따라 여러 채의 집을 옮기면서 생활하셨는데, 손님도 모임도 없이 오로지 아내와 두 분만 조용히 쉴 수 있는 Retreat을 디자인하는 것이 우리 팀이 받은 브리프였다.
화려한 배경과는 달리 그분은 몸이 좀 불편한 분이셨다. 서서히 온몸의 근육이 퇴행, 위축되는 희귀 질환을 평생 앓고 계셨고, 내가 그분을 만났을 땐, 이미 휠체어에서 개인 비서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계셨다.
그분은 일찍부터 자신의 병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더 불꽃 같은 열정으로 일찌기 엄청난 부를 이루셨는지도 모른다. 정원사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자기 능력과 지능만으로 이룬 재물과 명예의 산. 그분이 만든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그분이 얼마나 지독하기로 악명높은지 살짝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만들고 싶은 공간은 그분의 화려한 사회적 위치나 부를 나타내는 공간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내 몸이 곧 멈춘다는 걸 알면서 동시에 자라야 하는 기분은 어떤 걸까.
다른 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자신은 점점 멈춰간다는 걸 느끼는 건 어떤 깊이의 고독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역행하는 자신을 끌어모아 자라도록, 나아가도록, 날아가도록 하는 건 어떤 힘일까.
여섯 살때 반에서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었던 활기찬 소년은 열두 살이 되자 반에서 꼴찌로 뒤처졌다. 서서히 멈춰가는 몸. 언제 끝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
그러나 어떤 영혼은 절망 안에서 더 강렬하게 타오른다. 뜨거운 푸른 불꽃 안에서 제련되는 강철처럼.
매 순간 순간마다 숨을 쉬듯 절망과 마주하고 한계를 극복하면서 그분은 주변과 자신을 태우고 다시 세웠다.
칼처럼 날카롭게 자신을 벼려가면서 전쟁처럼 싸워온 인생. 그 끝에 자리 잡은 공간.
시간의 뒤. 이런 영혼이 쉼을 얻을 공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여덟번째 공간 이야기: '흔(Scar), 공간의 결'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