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덟번째 공간 | 공감- 리처드 세라, Fluid Apartment
#우울. 멜랑콜리아
수전 손택은 에세이집 ‘우울한 열정’을 통해서 우울과 불안, 광기의 경계에서 일생을 싸웠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을 다룬다.
그 중, 발터 벤야민의 삶을 다룬 장, ‘토성의 영향 아래’에서는 벤야민이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벤야민은 프루스트, 카프카, 괴테까지 언급한다)이 가진 기질, ‘멜랑콜리아’를 이야기한다.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 우울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우울한 기질의 사람은 살면서 잠깐 우울이라는 감기에 걸렸다가 낫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짝 우울한, 그러나 일상은 유지할만한 정도의 감정선에 머무른다. 에피소드라고 할만한 사건이 생길 때면 기분이 조금 더 떨어져 허덕거리고, 다시 회복되면, 그래도 정상의 사람보다는 살짝 쳐져있는 정도까지로 올라온다. 사실 나도 우울한 기질의 사람이다.
토성의 영향은 사람을 ‘무감각하고, 우유부단하고, 둔감하게 만든다.
- 독일 비극의 기원, 발터 벤야민
변명하자면, 무감각한 것, 둔한 것이 아니라 쳐져 있는 것이라 하고 싶다.
너무 많은 자극을 느껴서 오히려 둔해지도록 자기 껍질을 두껍게 두른 것이다. 그 껍질을 뚫고 들어오는 더 큰 자극을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많은 자극이 힘들어서 더 자신을 꽁꽁 싸매는 것이다.
수잔 손택은 벤야민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전형성, 평범함을 저항하려 했으며, 우울과 약한 의지(라고 평가되는)를 뚫고 나아가기 위해 더 과도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종종 우울한 사람인데 주변의 평가는 열정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울을 뚫고 나오는 열정은 그만큼 강렬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열정을 견디기고 나서 더 깊게 우울해지기도 한다. 깊은 우울과 뜨거운 열정은 서로의 연료가 되어 제 몸을 태운다.
일전에 임상심리학자이신 지인과 우울증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그분이 우울증 환자들이 우울한 이유는 그들이 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신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우울한 사람들은 더 발버둥을 친다. 표면상으로는 껍질을 뚫고 나오는 것이 적어 보이고, 느리고, 둔해 보이지만 사실 그 밑에서 열정적으로 바둥거린다. 현실을 잊어버리고 도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가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따뜻함을 찾기 위해서.
평생을 우울감과 싸워온 윈스턴 처칠은 우울증을 ‘검은 개’라고 말했다. 우울의 검은 개가 다가오면 흰 개를 키워서 검은 개를 이기고 나아간다.
그러나 검은 개는 결코 한 번만 오지 않는다. 계속해서, 또 동시에 점점 갈수록 크게, 그리고 겨우 간신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상처 난 자리가 또 상처나고
계속, 계속, 또 상처날 것을 알 때,
우울은, 슬픔은 삶의 전략이자 자세가 되어야만 한다.
#슬픔이 스민 공간 – 흉터
순수한 금속은 반짝반짝거린다. 철은 광택이 나는 은백색이며 구리는 타는 듯한 붉은 색이다.
이러한 순수한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많이 나 있다. 구멍이 많은 표면은 쉽게 속이 노출되기에 공기 중에 물(수증기)과 만나면 바로 녹이 슨다. 손이 닿으면 사람의 손자국이, 물이 흐르면 물자국 그대로 흔적이 남아 녹이 된다. 이런 금속의 부식, 또는 산화을 통해 철은 붉은 녹(산화철)이 생기고 구리는 녹청으로 변한다.
부식이 생겨 표면에 녹이 생기면 금속 자체의 성질은 더 약해지고 푸석해져서 쉽게 마모된다.
그러나 여기에 소량의 인, 동, 크롬, 니켈등 다른 성분들이 더해지면서 표면에 아주 치밀하고 촘촘한 녹층이 두껍게 형성되면 오히려 아래의 금속을 보호하는 방패가 된다. 테플론 프라이팬에 더 이상 음식이 달라붙지 않는 것처럼, 금속 표면의 구멍을 코팅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런 금속의 성질을 파티네이션 현상이라고 하고 이러한 껍질, 층을 파티나 (Patina)라고 부른다.
산화 강판(Corten)이나 청동은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미리 금속에 화학 처리를 해서 만든 저합금속이다. 일반 금속에 비해 4-8배 우월한 내후성을 가지고 용접, 가공도 더 쉽게 된다. 무엇보다 용접을 통해서 또는 환경적 요소로 표면에 상처가 생겨도, 공기와의 계속된 접촉을 통해 스스로 회복되는 성질이 있다.
리처드 세라는 이 녹슨 강철판을 주로 이용해 건축과 조각(설치)가 만나는 지점에서 작품을 해온 아티스트이다. 과도하게 큰 코르텐 강판으로 공간을 압도적으로 채운다. 형태는 주로 미니멀하고 거대한 스케일 덕택에 감상자는 작품을 통해 건축적 체험을 하게 된다.
Resource: https://www.flickr.com/photos/thierry-clouet/30034784797/in/photostream/
거대한 강철판을 구부리고 이어가면서 매끄러운 형태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동시에 어우르는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는 공학과 미학, 건축과 미술이 만나는 모더니즘 아트의 정점에 있다.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하는 체험을 하면서 관람자는 작품과 대치,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작품에 침잠하게 되고 흡수하게 된다.
녹슨 강철판의 거친 표면으로 빠져들어 간다. 좁고 회오리치는 통로를 걸으면서 녹슨 강철의 공간을 마주하고 또 벗어나면서 관람자가 느끼는 건 바로 공간의 지각, 연속되는 공간감(Continuum of the Space)이다. 작가는 오브제로서의 작품에서 벗어나 자기 작품으로 ‘공간을 제시하고 (Declare), 규명하고 (Define), 분할하려(Divide) 한다’
당신이 작업 안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고, 그것을 통과할 수 있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만들고, 또 그러면서 자연으로 열리게 하고 싶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경험인데,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만들어 낼까를 고민했다
- 리처드 세라
세라는 그 답을 일본 교토 사당의 정원과 동양의 공간 미학을 연구하면서 찾았고 작품을 통해 우리의 몸이 어떻게 시간과 관계하면서 공간을 지각하는가를 실험했다.
간결한 형태, 거대한 물성을 건축적 스케일로 확장할 때, 그리고 그 공간을 체험할 때, 공간은 몸이 투사되는 외부의 형태로 연장된다.
또한 내밀한 신체적 자극, 즉 녹슨 강철판의 거친 질감과 미묘하게 달라지는 공간의 흐름을 엄청난 스케일로 체험하면서 내가 그 물성에 침잠될 때, 그 순간 우리 내부의 지각의 공간이 열린다. 물리적 공간을 지우고 내면의 영원의 시공간으로 들어가 ‘나’를 마주하게 되는 경험은 명상의 Mindfulness나 현상학과도 통하는 듯하다.
# 흉터. 흔적.
시간이 지나간 뒷자리. 공간의 결. 영혼의 흔적
지난 이야기에서 말했던 클라이언트의 집도 이러한 흐르고 연속되는 공간감의 공간 철학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계속되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파티나 (patina). 그 흉터의 자리를 아름답게 품고 흐르는 넓고 자유로운 인식(mindfulness)의 공간.
4개의 방으로 가득 찼던 큰 아파트 벽을 최대한으로 허물어 공간을 모두 열었다. 1개의 침실 (벽이 아닌 커튼으로 둘러있는), 남편과 아내에게 각각 분리된 욕실 (각자 방 하나의 크기이다), 손님용 욕실과 세탁실, 그리고 그 중심을 차지하는 오픈 플랜의 주방-다이닝-거실.
공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곡선의 벽으로 흐른다. 이 곡선은 클라이언트의 휠체어 동선을 따라 여유롭고 직관적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었다.
가구와 화장실, 부엌 등 사용하는 생활 공간들을 다 클라이언트와 함께 직접 시연해보면서 맞춤 높이와 거리를 함께 찾았다. 휠체어를 타고도 편안하게 돌아다니고, 휠체어에 앉아서 아내를 위해 직접 간단한 요리도 할 수 있도록 디테일을 신경썼다. 모든 공간과 동선이 클라이언트의 몸과 부부의 생활에 맞춰지도록 함께 만들어갔다.
바닥과 벽은 은은한 광택이 나는 흰 벽으로 하고 시선을 막는 벽과 가구는 최소로 줄여서 편안한 백드롭(Backdrop)이 만들어졌다.
다만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는 클라이언트에게 의미가 되는 오브제들과 자재로 개인적인 이야기가 스며들었으면 했다. 화장실의 벽과 바닥은 자개타일로 마감하고, 부엌 상판이나 커스텀 가구들은 클라이언트의 별장에서 벼락을 맞고 쓰러진 나무의 목재를 하나하나 직접 골라서 사용했다. 곡선과 곡선이 만나는 접점의 부분들, 배경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들과 핸들, 수도꼭지, 걸레받이 몰딩 등 손과 발이 만나는 부분들은 이번 설계의 핵심이었던 구리판으로 마감했다.
속살이 드러난 듯 아리게, 황혼의 노을처럼 붉게 타오르는 구리는 클라이언트의 손과 발이 가는대로 흔적들을 담고 푸른 청동빛으로 늙어간다.
몸의 길을 따라, 손길을 따라 녹이 슬고, 다시 긁히고, 또 다시 녹이 스는 과정을 통해 결국 아름다운 청동의 그림으로 익어가는 구리판을 보면서 그 분들의 인생이 위로를 얻으시길. 하는 마음이었다.
벼락을 맞고 쓰러져도 다시 아름다운 가구로 태어나는 나무와 상처를 품어서 더 영롱한 빛의 산란을 낳는 자개를 보면서 힘을 얻으시길. 하는 마음이었다.
공간은 그분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그분들의 몸과 마음의 흔적을 따라, 삶의 흔적을 따라 다시 태어날 것이다.
#슬픔이 자세가 될 때- 회복 탄력성
슬픔이 자세가 될 때 시선은 따뜻함을 얻는다.
그건 자신의 슬픔을 체념하고 포기하는 염세주의가 아니라 슬픔의 밑바닥에 깔린 이끼 같이 포근한 연민의 힘이다.
슬픈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강철판 녹의 미세한 흐름, 인생의 녹이 쌓이고 쌓인, 지층의 시간을 겪어온 슬픈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려 가만히 만져줄 수 있는 공감의 힘. 바닥까지 갔기에 다시 올라올 수 있는 탄력성이 슬픔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만든다.
금속이 녹이 슨다고 해서 표면이 완전히 닫히는 것이 아니다. 녹슨 강철판은 여전히 스크래치가 나면 반짝거리고 연한 속살을 드러난다.
그러나 곧, 새로 생긴 속살도 아파하면서 다시 녹이 슬고, 새로운 지층이 되어 금속을 보호한다. 금속 자체는 끝까지 연하고 무르지만, 녹이 슬고, 흉터가 생기고, 다시 회복되는 자세가 일반 금속보다 더 강한 합금을 만든다.
사실 몇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다.
우울이 최대치에 달해 최고로 날카로와졌을때, 퇴근길 역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꺼진다고 느끼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걸 알아.
지금 이 감정을 겪기 위해, 지금 이 감정을 뚫고 나가기 위해, 나는 지금껏 준비되어왔어.
20대의 우울도, 30대의 우울도, 지금 40대의 우울을 감당하기 위해 쌓이고 쌓인 녹이구나.
지금도 아프지만, 여전히 새 것처럼 아프고, 앞으로도 아프겠지만, 나는 50대의 우울을 위해서 지금 한 걸음 한 걸음 걷겠지. 우울한 60대와 70대의 우울한 할머니로 늙어가면서, 아파하면서도 꿋꿋이 삶이 아름답다고 살아가겠지.
그리고 주위에 전화를 걸어 아프다고 말하고. 일기를 쓴다.
여전히 삶은 약간 우울하고, 그래서 더 찬란히 아름답다.
#더 나누고 싶은 것:
도재명, 시월의 현상 (도재명, featuring 남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