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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조 Nov 17. 2024

낙엽, 사랑과 이별

가을 낙엽으로 떠올린 이별

집을 나서면서 꼭 통과해야 하는 유리문 앞에 서면 가장 먼저 세상의 색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동빛이 감도는 갈색과 황토색, 빨갛고 노란색, 청명함을 잃은 초록색 등이 그라이데이션을 이루며 눈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다. 이내 유리로 된 자동문이 열린다. 얇은 유리문으로 분리되어 따로 머물던 안과 밖의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서로 얼싸안고 뒤섞이면서 가을 아침의 서늘한 기운이 내 앞으로 밀려 들어와 나를 훑고 지나간다. 눈에 들어온 색으로 먼저 계절을 느끼고 이어 체감한 서늘함에서 나는 이 계절이 가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만추의 가을색 자태를 뽐내는 가로수를 하나씩 번갈아 바라보며 그 사이를 걷는다. 하지만 가을 느낌에 이내 익숙해져 가로수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목적지를 향한 발걸음에 집중하며 주변을 살핀다.


평일 아침 시간의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은 사람들로 붐빈다. 가만히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대부분 무표정에 가깝다. 때론 기쁘거나 즐거운 표정을 한 사람을 마주치기도 하는데, 감흥 없이 걷거나 서있는 사람들 틈에서 그런 사람을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심각하거나 고민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한 사람을 마주치면 그 사람들의 사연을 상상하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실제로 기쁘고 즐겁다거나 혹은 심각하고 고민이 있어 보인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감정이 없는 상태라도 그런 식으로 얼굴 표정이 나타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한다. 나는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가 사람들 곁을 스치거나 마주할 때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해왔는데, 그래서 나는 미소 짓는 표정을 위해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리곤 했다. 이제는 그게 습관이 되어 웃상으로 굳어졌다.


번화가를 지나쳐 오래된 가로수가 한쪽에 죽 늘어선 한적한 골목에 들어선다. 바람도 불지 않는 골목길 가로수는 떨어뜨릴 듯하면서도 용케 나뭇잎을 붙잡고 있다. 가볍게 바람이 불어와 가로수를 간질였고 파르르 떨리던 가지에서 몇몇의 나뭇잎이 떨어진다. 낙엽. 눈앞에 낙엽 하나가 팔랑이며 천천히 떨어진다. 무겁지 않게 사뿐히 골목길에 내려앉는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니 머리 위에서 또 다른 낙엽 하나가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가 때맞춰 떨어지는 것처럼. 불현듯 그 낙엽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그만 바람에도 궤적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두 손바닥을 마주 펼치고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가슴 높이까지 떨어진 낙엽은 갑작스레 방향을 틀었고 나는 두 손을 포개어 배를 덮었다. 다행히도 바스러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낙엽을 받아내었다. 가지와 마주하던 잎자루 끝은 이미 메말라 있었고 나무는 이전부터 나뭇잎을 떨굴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 싹트는 시기를 봄으로, 한창 깊어지는 사랑의 시기를 여름으로, 사랑이 무르익는 시기를 가을로 표현하지만 바닥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낙엽이나 헐벗은 나무의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 탓에 가을은 이별의 계절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랑은 가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우리의 내면을 따뜻하게 감싸고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자리매김한다. 또 사랑은 우리 스스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축복으로 여길 만큼의 황홀한 감정을 선물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변덕쟁이 사랑은 우리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며 행복과 불행을 넘나 든다. 그리고 청록의 풍성한 잎들을 낙엽으로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가지만 드러낸 나무처럼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처연히 서있게 된다.


청록의 생기 넘치던 잎새를 가득 매달았던 가지가 앙상하게 속살을 드러낸 모습은 온기를 잃은 사랑의 연약함, 황량함, 쓸쓸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풍성했던 사랑일수록 빈자리는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느껴진다.


바람이 혹독한 겨울을 예고하듯 조금씩 차가워지고 색이 바랜 나뭇잎이 떨어져 바닥에 겹겹이 쌓이면 곧 한 계절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따뜻한 차와 사랑의 온기가 그리운 계절이 오고 있음을 고대한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yeon woo lee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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