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면 일곱 개의 오름이다. 실상은 오는 날과 가는 날은못 갔으니 5곳을 갔어야 맞다. 그런데 우리는 7개의 오름을 올랐다.
첫 오름은 이미 언급한 이승이오름. 두 번째는 성산일출봉이다. 성산봉 같이 유명한 관광지는 이미 외국인 단체 관광객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었다. 그런데 성산봉에 외국인이 없었다. 그 한가로움이 17년 전 신혼여행의 그 성산일출봉이렸다! 세 번째 오름은 군산. 서귀포 서쪽에 있는 오름이다.네 번째는 고근산이라는 오름이었다.바람 소리가 너무 좋아 소리를 담아가고 싶은 오름이었다.마지막 하루를 남기고 4개의 오름 밖에 가지 못했으니 조바심이 났다. 이렇게 돌아갈 순 없다. 가족들을 모아 놓고 선포를 했다.
바람과 갈대가 만나는 소리
"난 내일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오름과 그 근처에 용이 누운 것 같다는 용눈이오름을 꼭 가야 겠어. 그리고 다랑쉬오름에 새끼 오름처럼 붙어 있다는 아끈다랑쉬오름은 나 혼자라도 다녀올테니 그런 줄 알아!"
세 아이들은 무슨 오름 중독자냐며, 아빠의 횡포라며 한 목소리로 불평을 쏟아 놓았다. 저항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이 저항을 이기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대신 내일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다랑쉬오름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정상의 모습이 달의 분화구를 닮아 '월랑악'이라고도 불린다. 산에 오르면 기대하는 풍경이 있다. 확트인 시야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저 멀리 펼쳐지는 바다의 수평선. 바로 그 상상하는 바가 펼쳐지는 곳이 다랑쉬오름이다. 내려오자 마자 작은(아끈) 다랑쉬를 한 걸음에 올랐다. 다랑쉬와 다르게 정상의 분화구는 완만하고 나지막해서 그 가운데를 헤치며 걸어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충분히 만끽하고 마지막 용눈이오름을 향했다.
내비게이션에는 분명 용눈이로 가는 지름길로 나와 있는데 갈 수가 없었다.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얼마나 길이 엉망인지 도저히 차가 진입할 수가 없었다. 중도 포기하고 차를 돌려 나오는데 그나마 차가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무심코 들어섰는데 차 너덧대 정도 들어갈 주차장 공간이 있었다. 여기가 뭐지? 다랑쉬굴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유적지 다랑쉬굴로 가는 작은 길이었다.다랑쉬에는 원래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70여년 전 좌익으로 몰린 다랑쉬 마을의 주민 11명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토벌대를 피해 오름 아래 굴로 피신을 했다. 토벌대는 이들을 잡기 위해 굴 안에 수류탄을 던지고 불을 피워 모두 질식시켜 죽였다. 그리고 이 다랑쉬 마을엔 이후로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1992년, 진상조사단에 의해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 중엔 3구의 여성과 1구의 아이도 있었다. 아름다운 이름 다랑쉬에는 이 나라의 슬픔과 질고를 함께 품고 있었다.
3개의 오름을 가려다 잘 못 들어선 길에서 맞다뜨린 무거운 역사 앞에 우리는 숙연해졌다. 여전히 우리는 이념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코로나로 모두 숨죽여 있던 8월 광복절에도 이념으로 인한 아픈 현실이 가져다 준 코로나 재 확산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남북이 진정한 평화의 화해를 하고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 다섯 식구가 평양에서 랭면을 먹고 금강산에서 절경을 보며 '다랑쉬'를 이야기 하며 여행을 다닐 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