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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jay Dec 03. 2020

제주 보말의 복수

필수 여행 경비 중 가장 큰 부분이 교통비다. 그다음이 숙박비일 것이다. 교통비와 숙박비에 따라서 여행 중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숙박비도 교통비도 얼마 들지 않았던 제주 일주일 살기에 숙소가 가정집인 것은 짠돌이 아빠에겐 행운이었다. 왜냐고? 밥도 해 먹을 수 있으니까!!


아침은 간단히 빵 또는 집에서 싸 온 밑반찬으로 먹었다. 집을 나서기 전 점심도 장을 봐서 직접 해서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먹고 싶은 제주 음식을 사 먹기로 했다.


막내가 먹고 싶은 첫 제주 흑돼지 삼겹살이었다. 서귀포 축협에 가니 흑돼지 삼겹살이 수도권에 비해 많이 다. 흑돼지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을 비교하려고 일반 삼겹살도 같이 샀는데, 사실 난 뭐가 다른지 모르겠더라. 어떨  음식 맛보다 분위기와 스토리를 먹는 거 아니던가. 제주에서 먹는 제주 흑돼지에 행복하면 된 것이다. 이태리 요리 셰프가 하는 제주 당근 떡볶이도 맛있었고, 콩나물 무침과 파 무침이 듬뿍 들어간 제주식 두루치기별미였다. 지막 오름이었던 용눈이를 내려와 찾아갔던 종달 고기국수도 일품이었다. 그중에 우리 식구의 최고 제주 음식은 단연 선리보말칼국수다.


지인이 꼭 먹어보라고 신신당부한 칼국수 집. 칼국수가 맛있으면 뭐 얼마나 특출 날라고. 서울에도 칼국수 맛집 천지삐깔이구만. 유명한 집이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코로나로 사람이 줄어든 거라는데도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 구시렁구시렁 불평을 쏟아 놓았다. 화구 하나에 칼국수를 끓이나 보다는 둥, 주방에 할머니 혼자 요리를 하는가 보다는 둥, 주문 들어오면 그때부터 보말을 다듬는 거 아니냐는 둥. 제주에 그 유명 돈가스 집에서 점심에 돈가스 하나 먹겠다고 전날 밤부터 텐트 쳐 가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우리 식구는 이구동성으로 말했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두 군데 제주 맛집을 가지...


보말칼국수가 나왔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이 고둥류의 식재료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풍부하고 진하고 맛있는 칼국수가 있을 수 있다니. 이건 분명 제주의 바다를 머금고 자란 보말이 자신을 희생해서 바다 건너 멀리까지 찾아온 객들에게 주는 천상의 음식 선물이 아닌가!! 숨도 쉬지 않고 국물 한 모금까지 다 먹어 치웠다. 다시는 함부로 음식 불평을 하지 않겠노라고 주방을 향해 마음의 큰 절을 하고 식당 문을 나섰다.


다음 날 해변 산책을 하는데, 바위들 틈새에 보말이 보였다. '내가 어제 네가 먹었던 그 보말이야'라고 보말들이 쏟아져 나와 인사를 했다. 이렇게 반갑게 인사를 해 주는데 미안하구나. 수렵채집의 유전자가 각별한 우리 식구는 보말을 주어 담기 시작했다.


"우리 이거 삶아서 내일 보말죽 끓여 먹자!"


우린 역시 수렵채집에 능한 원시 부족의 피가 흐르고 있던 것이여~


그러나 그건 노동 지옥의 서막이었다. 삶은 보말을 껍질에서 빼내는 것은 다슬기의 그것과는 달랐다. 맛있는 속살을 절대 쉽게 주지 않겠노라고 신과 굳은 맹세를 한 것일까? 일일이 망치로 껍질을 깨야만 그 살을 얻을 수 있었다. 오전 내내 망치질을 한 끝에 우리는 다시 한번 보말이 선사하는 풍부한 맛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제주에서 보말 요리를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큰 절부터 하리라 보말과 굳은 다짐을 했다.


망치질 노동의 대가로 그 맛을 허락해 주었던 천연산 보말죽 님시이여~


마지막으로 축협에서 신기한 고기를 발견했다. 말고기였다. 어쩌면 제주에서나 맛볼 수 있을 특별한 고기. 먹어보자며 냉동 말고기를 3팩이나 샀다. 그런데 이 말고기는 지금까지 우리 집 냉동실에 고이 모셔져 있다. 먹깨비 다섯 식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말고기는 여전히 냉동실을 탈출하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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