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검사 해석
1시간 반 넘게 했던 심리검사의 결과 및 해석을 듣는 시간이라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 모르기에 상담가의 손에 들린 종이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결과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기질과 성격 중 성격 부분의 자율성과 연대감을 합한 점수가 인격의 성숙도를 나타낸다고 했는데 보통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경우 20점대 또는 그보다 미만인 경우가 상당수라고 했다. 그런데 내 결과는 83점이었다. 잉? 상담가는 이런 점수는 상담센터에서 보기 드물다고 하며 굳이 심리상담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높다고 했다. 다만 좋은 쪽으로 답변하려는 경향이 약간 있다고 나와서 그런 걸 감안해 10% 정도 점수를 낮게 본다고 해도 여전히 높은 점수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문장완성 검사에서도 동일한 수준으로 결과가 나와서 총합을 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어라, 짧은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당황스러웠다. 분명 내면적으로 많이 힘든데 심리 검사 결과가 이렇게 나오다니? 굳이 심리상담이 필요하지 않은 정도라니. 이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마도 이전에 있었던 휴직과, 권고사직, 퇴사. 그리고 이직 및 재취업이 원활하게 되지 않은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서 불안도가 높아지고 불면이나 여러 신체화 증상이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기에 아마 상황이 달라지거나 상황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변화가 생긴다면 금방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기뻐해야 하나? 분명 심리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 맞을 것 같은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조직검사 결과가 좋게 나와서 다행이면서 동시에 검사에서 뭔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3가지의 심리 검사 결과 종합적 평가가 저렇게 나왔다는데 굳이 불신하거나 딴지를 걸 이유는 없어 보였다. 내 상태가 생각보다 좋다는 게 희망적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일인데 이것 조차 불안해할 필요가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아직 실업급여 수급 일자가 꽤 남아 있지만 이력서를 보고 제안 온 곳에 면접을 보고 테스트도 패스해서 교육 후 입사 일정이 잡혀 있는 상황이 되자 여러 신체화 증상(불면, 두통, 소화불량)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상황이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증상들이었다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심리검사를 받던 날은 이 모든 일정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상황의 변화가 영향을 줬다고 할 수는 없다.
알쏭달쏭한 상태로 일단은 기분 좋게 검사 결과를 들었다. 결과지를 가져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센터 규정상 결과지 외부 유출은 안된다고 해서 들었던 내용은 머릿속으로만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기억하긴 어려웠지만 기질에서는 사회적 민감성이, 성격에서는 자율성과 자기 초월이 꽤 높은 편이라고 했다. 자율성과 자기 초월은 거의 상위 2, 3%로 나왔다.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경우 장점으로는 타인과 강한 유대감을 갖고 협력이 잘 되는 타입이고, 타인의 감정적 변화나 필요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한다는 것이 있다고 했다. 반면 단점으로는 타인의 평가와 거절이나 비판에 에 민감한 편이며 스스로의 평가와 판단 보다 타인의 평가와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었다. 오, 그래서 내가 일련의 휴직 사태를 겪은 것인가? 휴직 당시의 나는 무력감, 자살사고, 깊은 우울감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태였다. 반복되는 공개적인 질타와 모욕감, 사과를 받았으나 받지 않은 것만도 못한 사과에 대한 굴욕감이 나를 집어삼켰었다.
자율성은 책임감, 목적의식, 유능감, 자기 수용, 자기 일치와 연관이 있으며 스스로 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만 동기부여가 높게 되는 성향도 있고 그렇기에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높은 책임감을 갖게 된다고 했다. 전체적으로는 삶을 자기 주도형식으로 이끌고 가는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목적에 대한 이해와 동의가 없이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타입이고 그걸 바탕으로 일을 할 때 책임감이 상당히 높은 편이니 맞는 것 같았다.
자기 초월은 보통 창의력, 창작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이것 또한 상상력이나 자유로운 발상이 높은 걸로 볼 수 있고 현실적이거나 실용적인 사고, 과학적인 사고보다는 그 반대편의 사고력이 더 뛰어나다고 했다. 확실히 문송한 체질이다 보니 수학, 과학 이런 것과는 꽤 거리가 멀고 MBTI에서도 현실적이거나 실용적인 면의 반대쪽이 더 높으니 이해가 쉬웠다.
그래, 생각보다는 내 상태가 최악은 아니구나. 그럼 나는 더 나아질 희망을 품어도 되는 거다. 열심히 병원과 센터를 다니며 상담을 하고 약을 먹은 그간의 노력이 헛일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심리 검사 결과는 뜻밖의 큰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