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안이다 Aug 10. 2022

풀의 시간

그림에세이(18)

공원 산길 한가운데 풀이 자란다. 길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지나다니는 통로로 마련된 곳인데도 풀은 그곳을 자기 거주처로 삼았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누가 다닌다고 해도 조금의 움츠림이나 망설임 없이, 수십 가닥의 풀자락을 사방으로 펼치며 자기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


풀의 집은 하필 산책자들이 온종일 오가는 산길 한가운데이므로, 단지 일 년을 살 뿐이지만 수십 년을 살아온 것처럼 그야말로 별의별 인간을 다 보고 지낸다. 스마트폰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산책하는 사람에게 밟혀서 풀 자락이 끊기기거나 짓이겨진 일은 허다했고, 자기가 이름을 모를 뿐이면서 풀만 보면 무조건 잡초라고 여기면서 재미삼아 짓밟히거나 뽑혀 나가는 일도 수두룩했다.


풀이 알기에는, 모름지기 산에 널린 책들을 보며 걷는 것이 ‘산책’이라는 건데, 그런 이들은 굳이 공원 산길로 왜 산책을 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부분 산책자가 풀이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다리를 들어 올리거나 걸음 방향을 틀어서 풀이 다치지 않게끔 피해 간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 지구상에 대다수이므로 풀을 비롯한 식물들은 지구에서 더 지내보기로 했다. 물론 당분간의 일이고, 그 결정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그러니까 내일의 지구에는 풀과 나무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풀은, 어제오늘 본 것들을 씨앗에 새겨놓는다. 굳이 길 한가운데다 뿌리를 내리고 안테나처럼 사방으로 풀 자락을 뻗어놓고, 여기 세상의 주인은 자기들라고 오해하는 인간이란 종을 구경한다.


<풀의 시간>, 펜과 수채, 16절, 2022년 7월 作


이전 19화 고인돌의 시간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너라는 바깥세상, 나의 내면풍경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