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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졍씅 Feb 13. 2024

비포 선라이즈 in 2019


“내가 사랑했던 건 너일까 너를 사랑하던 그때의 나일까”     


 흔히 사랑 얘기를 할 때 나오는 진부한 말이다. 오래전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당연히 만났던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럽 여행 중에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을 만났다. 문득 생각나서 나를 과거로 불러들이는 사람. 아직도 내가 붙잡고 있는 건 그때의 너인지 너와 함께 하던 시간들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시작이 우연이었기에 더 특별했던 걸까.     


 스페인의 작은 도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그는 그저 평범했다. 득실거리는 서양인 속에서 만난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이라 반가웠던 정도.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그저 인사만 하고 스치듯 지나쳤다. 그 후에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스치듯이 마주친 인연은 거짓말처럼 그 후에도 이어졌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도시로 이동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공항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시내로 이동하는 동안 끊임없이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만날 확률을 얼마나 될까. 대화에 집중한 나머지 보딩 안내도 듣지 못하고 이름이 불린 건 또 처음이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기억에 나지 않지만, 많이 웃었던 건 확실하게 기억난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참 편안하고 좋았다. 일몰을 놓칠까 봐 헐레벌떡 달렸지만, 막상 해가 질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추운 바람을 맞으며 와인을 홀짝이던 그 시간도 힘들었기보단 예쁘게 기억된다. 추위를 피해 들어간 식당의 조명은 은은했고, 주변은 시끄러웠고, 우리는 가까이 붙어 이야기를 나눴다. 앞서 마신 와인에 또 와인이 더해져 알딸딸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점점 커졌다. 

 가게를 나와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오르막길 계단이 나오면 힘들다고 칭얼대고 내리막길은 또 신나서 뛰어내려 가고. 더 이상 추위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다 힘들면 길거리 벤치에 앉아 먹다 남은 와인을 홀짝이곤 했다. 게스트하우스 입구에서 헤어짐이 아쉬운, 그렇지만 차마 무언가는 할 수 없는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때까지도 그에게 느낀 감정이 그저 편안함과 호감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랐을까.     

  

 그와의 인연은 다음 여행지에서도 이어졌다. 마지막 날 밤 마트에서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그의 게스트하우스 다이닝 룸에 숨어들어 술을 나눠 마셨다. 서로의 음악, 영화 취향과 취미를 공유했고 지난번처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화이트 와인은 달달했고, 설렘과 편한 감이 공존하는 그 느낌을 잊지 못할 것만 같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마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헤어짐이 한 시간도 체 남지 않은 순간에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를 더 알아가고 싶었지만 당황스러움과 한편으론 용기 부족으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렀고, 정말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가 나를 역에 데려다주었고, 전보다 더 진한 공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그때 미친 척 손 한 번만 잡을걸. 아쉽지 않은 척 쿨하게 돌아서지 말걸. 만약 다른 행동을 했다면 우린 달라졌을까. 너도 왜 나처럼 용기 내지 못했을까.     


 인연은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했던가. 남은 여행에서 그의 생각이 많이 났다. 툭툭 머릿속에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반복 재생되었다. 용기 내지 못했던 그 순간에 대한 후회와 함께.

 더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마음에 맞는,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방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애석하게도 그 이후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더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와 함께했던 며칠은 나에게 비포 선라이즈 같은 한 편의 특별한 이야기로 남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미화돼서 그럴 수도 있고. 


 그가 이 책을 봤으면 좋겠으면서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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