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창을 보면서 깃발을 흔드는 추억
오늘은 앤 대신 우리 딸 이야기로 시작해 본다. 딸과 절친과의 만남은 우연에 가까웠다. 딸이 그 애와 처음 만난 것은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그 친구가 딸에게 다가왔고 그렇게 헤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에 인사치레를 할 겸 놀러 가고 생일파티에 초대한 적도 했지만 이 둘의 우정이 그렇게 길 줄은 몰랐다. 딸과 절친은 3년 넘게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그전에도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에서도 많은 아이들과 놀았고 놀이터에 가면 두 시간쯤은 처음 보는 친구와도 어울려서 놀았던 아이였다. 어느 놀이터를 가도 몇 군데만 돌면 금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친구는 딸에게 특별했다. 처음엔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학교 가는 길에 만났던 그 친구는 다음 해에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고 그 둘은 오늘도 '우정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딸의 가방에는 우정 편지와 선물이 들어있었다. 길에서 마주 보다가 뛰어가서 사고 날 뻔도 있었고 딸이 코피를 흘렸을 때 친구가 학원으로 데려가서 코피를 막아준 적도 있었다. 엄마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파자마 파티를 계획해서 진행하다가 그 집에서 잔 적도 있었다. 밤에 무서워서 잠을 못 자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그 모든 건 내가 시킨 게 아닌 딸이 스스로 친구와 계획하에 짠 '작전'이었다.
이야기를 다 풀자니 너무 길어서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처음 딸 친구를 봤을 때 든 생각은 딸과 성격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마치 다이애나와 앤처럼. 그 애는 차분한 모범생이었고 운동에 관심이 없는 반면 딸은 학교는 열심히 다니지만 공부에도 관심이 그렇게 없는 편인 데다가 운동과 춤을 좋아하는 편인 데다가 감성적이다. 키가 좀 작은 것만 빼면 밥 먹는 것도 성격도 머리스타일도 말하는 것도 다 다른 두 아이가 서로 친하다는 것은 확실히 신기한 일이긴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이 둘을 방학중에 같이 공부시켜 보려는 계획도 세웠는데 완전하게 실패했다. 친구는 이미 딸의 수준을 넘어선 정도. 매일 스스로 공부한다니 더 손댈 것이 없다고 했다. 떡볶이를 먹으러 오라 했다가 '저는 엽기 떡볶이 먹어요'라는 말에 맵찔이 수준인 딸과 나의 수준에 바로 포기한 적도 있었다. 나의 개입은 참 쓸데없는 것이었다. 내가 끼지 않아도 이 둘은 이미 그들 만의 관계에 정착했으니) 이 시점에도 이 둘은 주말에 서로 약속을 잡고 둘만 놀러 가는 우정 1일 나들이 코스를 계획 중이다. 이 둘은 꽤 멀리 걸어가서 먹는 것부터 놀러 갈 것까지 다 정해놓았고 그날 신발은 무엇을 신을지 까지 둘이 하고 있었다. 그 둘은 네 컷 사진으로 우정인증을 하고 코인노래방에 가는 목표로 2주 넘게 엄마를 설득 중이다.
이 둘의 성격이 다른 데도 어울린 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한쪽은 좀 정적이고 다른 한쪽은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서로가 보완되기 때문이다. 다이애나가 앤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앤이 항상 주도해서 뭔가 사건을 만들어내고 다이애나가 그 스릴 넘치는 모험세계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 딸도 (집에선 겁쟁이긴 하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고 딸의 친구가 자기에게 부족한 활동성을 친구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다른 친구는 서로 친해지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모험을 제공하는 친구라면 호기심으로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한 때는 여행을 취미로 다니는 친구와 한 때 오랫동안 친했으니까. 그 친구는 나를 답답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많이 배려해 주는 따뜻함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용기를 얻어 나도 멀리까지 여행할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각자 해외에 있을 때에도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주고받았던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문제는 다이애나가 귀한 집 딸이고 엄마가 엄격하다는 점. 다이애나의 엄마는 앤 때문에 몇 번을 놀랐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내가 엄마 된 입장에서 딸이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와인에 취해서 돌아온다면 사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듯하다. 그 친구를 무조건 의심한 건 아니지만 어른들의 시각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다이애나의 어린 동생이 후두염에 걸렸을 때 앤이 도와주면서 다이애나 엄마의 의심은 풀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둘은 이후에도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많은 추억들을 함께 보냈다. 그건 앤 뿐 아니라 다이애나 인생에도 소중한 추억이었을 것이다.
다이애나가 에이번리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앤과 함께 진학해 계속 공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베리 씨 댁은 딸을 밖으로 보내지 않았고 이 둘의 운명은 잠시 헤어지게 된다.
지금도 앤과 다이애나처럼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동네에서 같이 사는 친구들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나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 이사를 가면서 절친들을 대부분 다 잃어버렸다. 그 이후에도 뿌리밖고 사는 곳에 친구들을 만들어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절친이 있다는 것은 참 드물고 신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유다. 그런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라도 내 아이에게 정말로 친한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다면 엄마가 해야 할 것은 필요이상의 개입을 줄이는 일. 그리고 한 동네에 길게 살아보는 일이다. 친구는 돈 주고도 살 수 없고 만들어줄 수도 없고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연히 생긴다면 앤과 다이애나처럼 잘 커가라고 지켜볼 일이다.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