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o am I Nov 10. 2023

앤 셜리, 처음으로 사과하다 1

아이가 잘못했을 때 부모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다른 두 자아가 충돌하는 소설 속 세계


상식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포함]로 되어있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이 상식의 범위란 본인에게 기반한 주관적인 측면이 있어서 문화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소설은 서로 다른 상식을 기반으로 한 사람들의 충돌을 다룬다. 일상적이지만 개인들에게는 세계관의 변화란 꽤 충격적인 것이어서 가끔은 자아를 무너뜨릴 정도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마릴라한테는 앤이 딱 그랬다. 마릴라에게 있어 앤은 같은 나라에 살며 같은 인종이고 같은 언어를 쓰고, 여성이며 기독교를 믿는다는 상식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세대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도 완전히 다르며 성격도 완전히 다른 '타자'였다. 게다가 앤의 처지가 고아라는 걸 생각했을 때 앤에게 마릴라의 권위가 억지로 먹힐 만도 하건만 앤은 어찌 된 일인지 조금도 굽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마릴라는 앤에게 기독교적 상식을 근거로 '밤마다 기도하기'와 '주일학교 참석' '기도문 외우기' 같이 기초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앤은 종교의 기본이 복종과 순종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 따라 할 뿐 마릴라의 의도를 완전히 맞추지 못했다. 마릴라가 처음에 단순하게 고아를 입양해서 학교를 보내고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호혜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터라 생각지 못한 '교육'이라는 큰 벽에 부딪히고 만다. 나와 상식이라는 기반이 아예 다른 이 아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세대와 문화관이 다른 앤과 마릴라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레이철 린드 부인이 제대로 충격을 받다


마릴라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었다면 그보다 이웃에 사는 보수적인 레이철 린드 부인과의 만남은 더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마릴라는 그나마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편견이 없는 편이었다면 레이철은 강한 편견과 오지랖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그녀로서는 앤이 하나의 뉴스거리로서 이웃사람에게 퍼트리기 이보다 좋은 가십거리가 없었다.


마릴라는 레이철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본인 나름의 의견을 강하게 나타냈다. 심지어 아이가 마음에 든다고까지 확실하게 표현을 했는데 레이철이 결국 선을 넘어버렸다.


"엄청난 책임을 자청해서 떠맡았네요. 더 군다가 마릴라는 아이를 키운 경험도 없잖아요.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성격이 어떤지 잘 알지도 못할 테고, 앞으로 어떠 사람이 될지도 알 수 없고요. 물론 상심하라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마릴라."

"상심하지 않아요. 나는 일단 마음먹으면 잘 흔들리지 않아요. 앤이 보고 싶을 텐데, 들어오라고 할게요"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 대해 레이철이 기본적으로 마릴라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를 볼 수 있다. 레이철이 오래 함께 지낸 이웃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그렇게 차리는 편이 아닌 걸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마릴라, 정말 깡마르고 못생긴 아이군요. 애야 , 이리 와 봐라. 어디 한 번 보자. 어쩜 주근깨가 이렇게 많니?

거기다가 머리는 홍당무처럼 빨갛고! 애야, 이리 오라니까?"


레이철이 앤의 외모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고 난 뒤 앤의 반응 또한 과격했다. 처음 만난 레이철 앞에서 울면서 직접적으로 퍼부은 대꾸는 물론이고 '문 쾅 닫기'까지 했으니 누가 뭐래도 오해를 살만했다. 그리고 난 뒤의 결과는 모두가 짐작한 그대로다. 레이철은 이 이야기를 그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실어 나르러 나갔다. 뉴스거리를 잡았으니 위풍당당하게.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서 최대의 피해자가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무례한 편이고 필터 없이 상대방을 평가하는 레이철이나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불 같은 성격의 앤이 충돌했을 때 사실 그 둘은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잃은 것이 없다. 하지만 최대의 피해자는 마릴라라고 할 수 있다. 마릴라는 앤이 마냥 좋아서 받은 것도 아닌데 좋은 일을 하려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생각 없이 고아를 받아서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식의 오해부터 인생처음으로 훈육책임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입장이 매우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며 마릴라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방금 전 일로 마릴라도 적잖이 당황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린드 부인 앞에서 그런 성질을 부리다니, 참 운도 없지! 그러다 마릴라는 앤의 성격에서 심각한 단점을 알게 돼서 마음이 아프다기보다는 창피해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앤에게 어떤 벌을 주어야 하지? 린드 부인이 친절하게 조언한 자작나무 회초리는 그 집 아이들에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마릴라는 마음이 내키기 않았다. 아이에게 매를 든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발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앤이 제대로 깨우칠 수 있도록 뭔가 다른 벌을 찾아야 했다.

이 대목에서 마릴라가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연민보다는 수치심에 가까운 창피함이었다. 아이가 남 앞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했을 때 부모가 느끼는 감정을 마릴라도 알게 된 것이다. 상대방의 행동에서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동질화를 느끼는 거울효과라고나 할까.

실제로 주변에서 아이가 사고를 쳤을 때 사과하기보다 큰소리를 내거나 재빨리 도망가는 부모들의 심리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보통은 그럴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아이가 하는 행동에서 부모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이 포인트 일 것이다. 이것 자체가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이기에 굉장히 공격적인 태도로 대응한다. 당신이 키우는 아이가 곧 자기 자신과 똑같다는 식의 말 때문에 자존감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한다. 물론 그들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격한 감정에 빠졌을 때 그 감정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는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수치심인가? 분노인가? 연민인가?


그래도 마릴라는 방에서 우는 앤을 불러다가 대화를 시도한다. 다정하게 부르려고 노력하면서. 하지만 감정이 격한 앤이 들을 리가 없었다. 마릴라는 보다 엄격한 태도로 앤을 불러 감정을 조절시키려고 했다. 앤은 고집스럽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계속 고수한다. 어떤 누구도 자신의 단점을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앤, 너도 아주머니에게 그런 식으로 화내며 말할 권리는 없다. 난 너 때문에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웠어. 네가 린드 부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길 바랐는데, 오히려 날 망신시켰다. 린드 부인이 네 머리가 빨갛고 못생겼다고 말한 게 그렇게 까지 화낼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구나. 너도 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곤 했잖니?"


"제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제가 그렇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 끼지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거든요, 제 성격이 못됐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아주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면서 숨이 콱 막혔단 말이에요. 아주머니께 화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마릴라는 문득 앤의 말속에서 연민을 느끼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에 친척 아주머니 한분이 마릴라를 보고 "어쩜 저렇고 까맣고 못생겼는지 가엾기도 하지"라고 말한 기억이다. 마릴라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상처를 갖고 있었던 것. 그런 연민이 지금 일어난 사태에 해결이 될 수 없겠지만.

마릴라는 어쨌든 마을에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며 사람들과 나쁘지 않게 지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다시금 주목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좋거나 나쁘거나를 떠나 똑같이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앤이 잘못한 것에 대해 레이철에게 가서 사과해야 한다는 것. 마릴라는 앤이 자신을 봐서라도 레이철에게 가길 원하지만 앤은 차라리 지하감옥에나 가겠다면서 강경하게 맞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은 어쨌든 그냥 두는 수밖에. 마릴라는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면서도 마릴라는 앤의 방문을 닫고 나오면서 자신도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에 빠진다. 앤에게 화가 난 만큼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마릴라가 느낀 감정이 단순한 고통과 분노만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마릴라는 말문이 막힌 린드부인의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나와 입이 씰룩거렸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바탕 웃고 싶었다는 것. 작가의 이런 섬세한 감정포착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놀랍게 느껴진다. 이런 복잡한 갈등 상황에서도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이 얼마나 여러 가지인지 세밀하게 잡아냈기 때문.


다음 편에서는 이 이야기 갖고 있는 보편적인 육아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훈육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최고조인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원만하게 관계를 풀어내는지 그 해결에 초점에 맞춰서 말이다.그리고 이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